시부야 역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가랑비가 내리는 스크램블 교차로에 들어서자마자 오가는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렸다.
시부야에는 가고픈 곳과 가야 할 곳이 공존했다.
커피의 명가라는 푸글렌 커피 그리고 이름만으로 골치 아픈 기념품 샾이다.
삶의 모든 일에 반대급부가 있기 마련이다.
그전에 허기부터 채워야 했기에 시부야 밀집지역 한가운데에 있는 라멘집을 찾았다.
바 형태의 식당은 마침 사람이 빠져 두 자리가 비었다.
줄을 서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도쿄에서 처음 맞이한 키오스크는 우리나라 이상으로 당황스러웠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자 자연스레 뒤에 줄을 선 다른 손님의 눈치를 보게 됐다.
카운터를 정리하던 사장님과 눈이 맞지 않았다면 식은땀 깨나 흘렸으리라.
우리는 돈코츠 라멘에 돼지고기 토핑을 추가했다.
된장 베이스의 돼지 육수와 도톰한 면발의 조화로운 비주얼!
그러나 맛에 대한 기대는 한 젓가락만에 깨져버렸다.
국물과 면이 짜고 새끼손가락 반마디쯤 되어 보이는 기름층은 느끼함을 더했다.
질긴 돼지고기에 느끼함을 잡아줄 별도의 반찬도 없었기에
그릇의 절반을 채 비우지 못하고 라멘집을 나서야 했다.
이상하기도 하지 옆자리 손님들은 국물까지 싹싹 비워내는 데,
새삼 세상은 넓고 입맛도 다양하구나 싶었다. 결국 도쿄에서의 첫 음식점 실패였다.
라멘집을 뒤로하고 오래 걸어야 하기에 딸의 양해를 얻어 푸글렌 시부야 점으로 향했다.
가족을 위한 기념품은 숙소로 돌아가기 직전에 사기로 합의를 본 터였다.
시부야 중심에서 골목 몇 개를 지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해진 거리를 만났다.
NHK 방송국 건물을 지나 조용한 주택가를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2층 주택 건물의 1층에 위치한 카페는 동네의 풍경에 녹아들어 원래 거기에 있던 것처럼
이질감이 없었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대기줄은 문 밖까지 이어져있다. 커피의 명소 다웠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 깟 줄이 대수랴.
예상외로 대기줄에 합류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금세 카페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사각의 Bar 테이블을 중심으로 주변이 몇 개의 탁자로 구성된 카페는
갈색 원목톤을 살린 인테리어로 커피숍이 아닌 재즈바 같은 느낌이었다.
저녁에는 술도 판매한다니 이 분위기가 납득이 갔다.
커피 푸글렌은 전문가 수준의 커피 애호가인 '도쿄 스페셜티 커피 라이프'의 저자
이한오 님에게 추천받았다. 물론 책에도 소개된 곳이다.
스페셜티 커피를 접한 지 3년째.
서투른 솜씨로 내려먹고 있음에도, 원두의 향과 풍미, 추출 기술과 숙련도에 따른
그 맛의 다름을 안다.
뒷 맛의 깔끔함과 잔향이 좋아서 스페셜티 커피는 어느 카페를 가든 눈여겨보는 터다.
푸글렌의 스페셜티 커피 한 잔과 딸의 당 충전을 위해 코코아를 주문했다.
대기하는 동안 푸글렌의 드립백도 하나 구입하고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비에 젖은 자전거 한 대, 카페 밖에서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셀카를 찍는 사람들의 모습이
카페 주변의 풍경을 풍성하게 했다.
아이는 츠타야 서점에서 구입한 일러스트 책을 보고,
나는 카페 안팎을 산책하며 주변을 담았다.
그야말로 비 내리는 날의 행복한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