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by 삼남매아빠


낙조를 보고파

오후 두 시가 되어 서해안으로 향했다.

물론 세 아이의 아빠로서 내 몫의 할 일들은 모두 마친 후다.

(그렇지 않으면 갈 수 있을 리 없지.)

날씨와 물 때를 살피지 않은 건 실수 같지만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구름이 끼면 어쩌지?

막상 도착해서 만조가 되면 어쩌나?

이런 걱정들이 머릿속에 자리 잡는 순간부터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서해로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티맵은 최적의 경로를 잡아 이상한 시내 도로를 경유해서

다시 고속도로로 안내했다.

모르는 길이라면 내비게이션의 경로에 내 생각을 섞어서 운전하면 정말 산으로 간다.

가는 동안 차창에 떨어진 빗방울에 '아이고야 망했구나.' 싶었지만

이미 4분의 3이나 와버렸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야 했다.

꾹꾹 참아 안내하는 길을 따라 돌고 돌아서 보령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해수욕장에는 오롯에 나만 있다.

삼각대와 표준 줌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가방에 넣어 해변으로 향했다.

물론 여분의 배터리도 포함이다. 주차장에서 한참을 걸어가야 하니

촬영 도중에 배터리가 떨어지면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다행히 썰물을 만났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떨어져 내렸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올리고 가만히 서서 잔잔하게 오가는 파도를 봤다.

물이 빠지면서 드러나는 플라스틱 조각, 부표, 생수병,

어느 배에선가 떨어져 나왔을 밧줄과 그물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홀로 죽어있는 복어도 발견했다.


다섯 식구의 가장이니 홀로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허투루 쓰다간 피곤하기만 하고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때로는 고독을 즐기기 위한 큰 전제나 목표 하나만 두고

나머지는 흘러가는 대로 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차피 이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다.



서해로 가는 일


큰 목표 하나는 달성했으니 됐다.

카메라를 가져왔지만 사진은 못 찍어도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도와 비는 내리지 않았고

청명한 대기는 아니지만

구름 낀 하늘이 편의점의 반투명 비닐우산처럼

빛을 분산시켜 셔터 누르기 좋은 색이 됐다.


조리개를 조이고 수동으로 초점을 맞췄다.

셔터속도를 느리게 해서 파도가 만들어내는 선을 흐리고

카메라의 센서가 온전히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물이 점점 빠지면서 빛도 함께 빠져나갔다.

천천히 조였던 조리개를 풀어주니

조급한 마음도 한두 개 정도는 내려놓은 기분이다.

가끔 이런 외유를 허락해 주는 와이프가 고맙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 셈이니

그럴 때는 사양 말고 고독을 즐기는 것이 내가 터득한 인생의 깨달음이라 할 만하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내 성정이 문제라 여겼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고독을 잘 즐기는 걸 보면

나는 꽤 괜찮은 자존감을 갖고 있지 않은가 싶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고 정성을 쏟아야 하는 사람

몇몇만 있어주면 된다는 걸 안다.


오늘 서해 참 고즈넉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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