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 말이 전달되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 왜 한국에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한때는 나만의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남에게 회자되기 쉬운 것들. 예를 들면 내가 요즘 관심 있는 분야라든가 깊은 생각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했다. 내 의도와 다르게 확산이 될 여지를 남기는 게 싫었으니.
나만의 영역표시. 이렇게 나만의 영역이 확실했던 내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으나 굳이 꼽자면 should have pp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반복해서 생각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어떤 강력한 한방 같은 계기보다는 평범해 보이는 한 문장이 심장을 뒤흔들기도 하는데 이는 어느 날 우연히 본 제프 베조스 (아마존 CEO)의 명언이었다. "비판받는걸 두려워하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
나에게는 관종의 기질이 정말 1%도 없는 것일까?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는 것만 본다면 그런가 싶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어릴 때의 나는 나를 너무도 많이 드러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아 춤도 추지 않았는가? 어쩌면 나는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해 나를 감추는 방향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제프 베조스의 명언처럼 비판이 두려워서 나를 드러내지 않고 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은 채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해도 살면서 100% 비판을 피하기란 어려운 요즘 세상에 리스크를 감수할 텐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한 번에 나를 다 드러내기보다는 천천히 은은하게 나를 드러내는 것으로. 그리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심도 깊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이전의 나는 왜 하나라도 평균 이상인 것이 없을까?라고 개탄했다. 할 줄 아는 건 많지만 다 중간 언저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할 줄 아는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마음이 그렇게 한번 송두리째 뒤흔들리고 나면, 백스텝으로 이전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깐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어본 이후에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2019년 어느 날의 겨울을 기억한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나오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 마음이 요동을 쳤다. 가슴이 뛰는 걸 느낀 건 매우 오랜만이었다."가슴속에 꿈이 없다면 슬퍼하라".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의 OMR 자필 확인 문구였다.
이 세상에 안티가 없는 사람은 없다. 주변을 둘러보자. 나와 같은 평시민도 '비공식적으로는' 안티가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안티가 없는 유명 연예인을 본 적이 있는가? 하물며 존경받는 지도자 또한 안티가 1명도 없는 사람은 없다(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간디가 소아성애자 이슈가 있다는 것도 최근에서야 알았다) 나의 안티에 대해서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도 인간의 미덕이려니 그냥 그러려니 해야겠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것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 한 번쯤은 나를 드러냈다가 상처 받은 기억이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이며 이에 정답은 없다. 나도 마음은 바뀌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남아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도 이거 한 가지는 확실하다. 무언가에 대해 스스로 충분히 자문해보고 어떠한 결정을 내렸다면 뒤돌아 보지 말 것. 요한 폰 쉴러의 명언처럼 "너무 많이 뒤돌아보는 자는 크게 이루지 못한다"가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