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 또 달렸다. 이렇게 며칠 연속으로 달릴 정도로 ‘달리기’ 광인 사람은 아닌데 다행히 컨디션이 좋아서 가능했던 것 같다. 이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스웨덴의 여름인가? 두 번이나 왔다 갔는데도 이제야 보게 되다니. 다른 건 잘 모르겠고 하늘이 이쁘고, 햇살이 쨍하다. 자외선 지수가 엄청나게 높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한 30분 정도 달리다가 가고 싶은 카페를 가기 위해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보니 문득 뭔가 이상하고 허전한 느낌이 든다. 찬찬히 훑어보니 ‘닫힘 버튼’이 없다. 자동으로 닫히는 저 문을 빨리 닫아야 할 정도로 위급하고 급한 일은 없다는 걸까. 사실 뭐 30초 빠르거나 늦는다고 큰일 나는 일은 없는데 말이다. 나도 최근에 들어서야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 번씩 바깥이나 현관을 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혹시나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 누군가가 뛰어들어오지 않을까 한번 쳐다보게 된다.
카페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Odenplan으로 갔다. 다소 단단한 식감의 식빵위에 아보카도와 수란이 올려진 메뉴를 선택. 창밖을 보니 아무도 없는 테이블 위 누군가 먹다 남은 케이크를 한 새가 열심히 먹고 있다. 저들에게도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려나? 난생 처음 맛 보는 빵을 열심히 즐기던 그의 시간은 안타깝게도 종업원이 자리를 정리함에 따라 강제 종료되었다.
서둘러야 했다. 어제 이름 모를 그녀와 ( 정확하지 않은 이름 ) 점심에 분수 근처의 벤치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오전에 잠깐 지도로 살펴보니 다행히 집 뒤편에 위치한 큰 규모의 분수는 하나뿐이어서 그곳이라고 확신했다. 포장해서 햄버거를 먹고자 바로 옆 쪽에 위치해 있는 햄버거 가게로 들어가 포장을 하고 기다리는데. 응? 창 밖을 보니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있다. 많이 오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서둘러 약속 장소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불길하게도 점점 거세어지는 비, 약속 장소에 가도 그녀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67번 버스를 타고 급하게 약속 장소로 갔고, 예상대로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적당히 내리는 비가 아녔기에 그녀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아쉬웠지만 발걸음을 돌려 에어비앤비 숙소로 들어갔다. 여행지에서 계획하지 않은 예상에 없었던 그런 만남들은 가끔 나를 설레게 했는데 그녀와의 약속이 그랬다. 가슴 뛰는 로맨스도 좋겠지만 그 이상이었다고 해야 할까나? 오늘의 점심은 방 안에서 먹는 햄버거가 되겠다. 답답하 마음에 방에 있는 창문을 열어 밖을 보았다. 이런 걸 비 멍이라고 하나? ( 내리는 비 보면서 멍 때리는 걸 비 멍이라고 한단다 다른 예시로 불멍도 있다.)
달리 생각해둔 일정이 없었기에 이제 뭐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래 잠깐 쉬어가는 시간을 가져가자면서 한 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비 멍을 때리다 보니 어느덧 오후 3시. 야속한 비는 그 때야 멈추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본마음에 드는 거리에 가기로 했다. 버스를 타러 나가면서 혹시 몰라 다시 한번 약속 장소에 가 보았지만 그녀는 없었다.
Odengatan에 내려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가 이전에 살았던 곳 근처였는데 그때는 왜 이곳을 몰랐었을까? 처음 해보는 사회생활로 마음의 여유가 딱히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가를 걷다 보니 발견한 아기자기한 생활용품 가게. 얼핏 보니 그릇 등을 파는 주방 용품 같았는데, 평소의 나 같으면 지나쳤을 법한 곳이지만 그날따라 한 번 들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나는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강아지 코기들의 이미지로 도배되어있는 컵을 득템 하게 되었다. ( 득템 : 아이템을 취득하는 것 , 뜻밖의 기쁨 )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하늘이 보내주는 뜻밖의 선물인 걸까 ㅎㅎ
근처에 들어가서 주스 한 잔을 하고 나왔는데 다시 세차게 내리는 비. 비를 피해 걷다가 근처에 있는 LP 레코드 가게도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는데 세상에나 내가 좋아하는 가수 ABBA의 LP가 있는 것이다. 집에 LP 플레이어도 없고 살 계획도 딱히 없었지만 '이건 무조건 사야 해'라는 생각에 구매를 했다. 오늘 하루는 우연이 우연을 낳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이것저것 사다 보니 짐이 많아져서 두고 나오기 위해 우선 숙소로 다시 돌아갔다. 이때의 시간이 오후 7시였다.
숙소로 돌아가서는 잠깐 방황했다. 보통 여행을 다닐 때 나는 차선책까지 계획을 다 세워두는 편인데 (그렇다 나의 MBTI는 ENFJ이다 ) 이 날은 그냥 무계획이었다. 무계획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이대로 숙소를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인턴 했을 당시 돌아다녔던 거리가 생각났다. 이전 편에서 언급했듯이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지 않았었기에 그 당시의 사치는 아이스크림 하나 사서 감라스탄 (스톡홀름 구시가지) 거리를 돌아다녔던 것이 거의 전부였다.
감라스탄에 가야겠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아직 밝은 거리.
다리에서 사진을 찍고 싶은데 혼자 여행하는 나는 누군가에게 또 사진을 부탁해야 한다. 아 저 멀리 얼굴이 밝아 보이는 여행객이 보인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누구에게 사진을 부탁해야 할지 알아보는 감이 생긴다?! ) 나이가 어린 10대 소녀로 보였다. 스웨덴 여행하는 거냐고 살짝 물어보니 사실 우크라이나인인데 지금은 폴란드에 있고 할머니와 함께 스웨덴으로 잠시 여행을 온 거라고 했다. 부족한 영어이지만, 우크라이나의 상황에 대해서 짧은 유감을 표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평안과 행운을 기원하는 작별인사를 했다. 돌아서서 생각해보니 점심때 방에서 먹은 햄버거 이후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그래 여기서 사 먹어야겠다' 예전이라면 외식비용 때문에 감히 생각도 못 했겠지만, 현재 직장인 신분인 나는 조금은 용감해진다. ( 다음 달의 카드 값은 다음 달의 내가 또 열심히 일해서 갚을 것이다)
조금 걷다가, 그냥 끌리는 식당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ENFJ인 나에게 이런 일은 보통 흔하지는 않다 ㅎㅎ) 배가 너무 고프기도 했고 지쳐서 어딘가 앉아서 여유롭게 즐기고 싶었다. 실내와 야외 자리 중 고민하다가 바깥 풍경을 보면서 먹고 싶어서 선택한 야외 자리. 메뉴판을 받아 들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날씨가 다소 쌀쌀하게 느껴져서 따뜻한 수프를 먹고 싶어서 주문하자 안타깝게도 재료가 소진되었다고 한다. 따뜻한 다른 음식을 추천 부탁하자 '브로콜리 & 블루치즈' 파이를 추천해주었고 사실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걸로 주문했다. 잠시 후 받은 음식의 맛은 꽤나 괜찮아서 가끔은 음식 선택에 이렇게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여러생각과 감정이 교차했다. 여기에서 음식을 먹어보기까지 딱 10년이 꼬박 걸렸구나.
지금도 딱히 엄청 여유롭거나 경제적으로 풍족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스럽게도 여기 앉아 저녁을 지불할 마음과 지갑의 여유 정도는 있어졌으니.
사실 이래저래 오늘 하루 계획대로 잘 된 게 없어 보여 뭔가 기분이 다소 가라앉아있었는데 감라스탄에서의이 시간들 덕분에 평온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밤 11시까지 혼자 거리를 거닐면서 구경하다가 집에 들어와서 깊은 잠에 잠들었다. 내일은 Vaxjo를 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