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조울 2. 우울의 하강나선

by 유보

“우울은 수용성이다”


라는 말을 좋아한다.

샤워를 하고나면 우울감이 어느 정도 가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문장인데, 사실 이것은 사실이면서 사실이 아니다.


우울감은 수용성이지만 우울증은 수용성이 아니다.


가벼운 우울감 같은 경우엔 샤워라는 행위를 통해 기분 전환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우울이 극에 달해 있을 때는 우선 씻는 행위가 극도의 노동이며, 샤워를 통해 기분이 나아지지도 않는다. 더러운 우울증 환자가 깨끗한 우울증 환자가 될 뿐이다.



의사가 우울증은 치료된댔어


정신건강의학과를 처음 방문한 것은 2017년 8월 2일 수요일이다.

친구의 소개로 갔던 서울의 한 개인 병원이었다. 상담 후에 자율신경검사를 받고 서면 검사 후에 상담과 자율신경검사를 한번 더 하고나서 마지막으로 상담을 다시 했다.

주관적 우울감 테스트에서 30점이 넘게 나왔다. 16점이 넘으면 약물 치료를 권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처방이 따랐다.


에스시탈로프람정 10mg, 하이라제정


"내가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이게 심각하구나"라는 걸 처음으로 인지한, 객관적으로 '증명받은' 순간이었다.


나는 단순히 내가 성격이 우울한 사람인 줄 알았다.


선천적으로 에너지가 낮고 내향적이고 우울한 사람. 그냥 애초에 그런 성격. 타고난 성향.

그런데 사실은 병이었다니.

치료를 받으면 나아질 수 있는 걸까? 희망인지 절망인지 모를 것들이 약 봉투에 담겨 내밀어졌다.


우물 같은 우울 2017.07.27 01:33
이런 날은 잠드는 게 어렵다
우울은 너무 내 곁에 오래 누운 친구였다 너무 오래된 친구
우울은 우물처럼 깊었고 습했고 마르지 않았고
우울은 우물처럼 내 옆에 있었고 항상 옆에 있었으며
우물에서 물을 퍼올려 마시듯 그렇게 우울을 마셨다
우물은 마르지 않았고 우울은 내 오랜 친구가 되어


이런 걸 쓸 정도면 치료를 받아야 할 수준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늦었다고 생각한다.

일찍 치료했으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도 치료 초기에는 해봤으나, 이제는 받아들인 지 오래돼서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가정의 늪은 이미 지나왔다.



초진 (의 기록)

우울증 너무 무서운 병이다.
평생을 병까지는 아니어도 항상 일정 정도의 우울감과 함께 살아서 우울하단 게 무섭다거나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생활이 안 될 정도로 우울해지니 이건 정말 무서운 병이다.
나는 지금 3無이다. 무감각, 무감정, 무기력.
이건 약을 먹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는데... 현실 감각이 전보다 더 떨어진 것 같다. 병원 가기 전에도 굉장히 무감동했다. 뭘 봐도 즐겁지 않고 슬프지 않고 정말 무감정 그 자체였다. 희로애락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아직 약효 볼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약 먹고 나니 그 증상이 더 심해진 것도 같고? 주관적으로 느끼는 약효는 우울을 느끼거나 우울해질 만한 생각을 어느 깊이 이상 못 파고 들도록 차단한다는 느낌이 있다. 전에는 잠들기 전에 누워서 미래를 생각하다보면 가끔은 정말 너무 불안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어제는 불안해질 일이 있었는데도 전만큼 우울한 생각도 안 들었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게 약이 차단해서 그런 건가 생각하니 굉장히 신기했다.
아까 외출했을 때도, 소나기처럼 비 쏟아지고 버스는 안 오는데 전 같았으면 굉장히 예민하고 날카롭게 막 왜 내가 밖에 나오니 비 오고 난리지, 왜 나는 꾸물거리면서 늦게 나와서 비 쳐맞고 있는 거지, 이런식으로 짜증내고 자학했을 텐데 이런 감정이나 생각이 정말 하나도 안 들었다. 그냥 '아, 전 같으면 이런 생각이나 감정이 들었을 텐데 신기하게 하나도 들지 않는다. 신기하다.' 이런 느낌이었다.
약간 현실이 푹신푹신해진 것 같다. 이게 약효인지 우울증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4번째 진료 (의 기록)

전과 비교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게 된 건 맞지만 아직은 약간 버겁다 조금만 뭔가 삐끗해도 다시 수렁 속으로 넘어져버릴 것 같다 그런 두려움이 있다 기분은 우울함이나 불안함 두려움 무서움 미래에 대한 공포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약이 잡아주고 있어서 평온하다 나는 평온하고 아주 무섭다 조금만 삐끗해도 영영 넘어져서 이번에는 일어설 힘마저 없을까봐


10번째 진료 (의 기록)


- 어땠나?
일주일 정도는 여러가지 하다가 일주일 정도는 또 늘어졌다
- 왜 그랬나?
하루 쉬면 그 뒤로 늘어지게 되더라 그러다가 다시 이러면 안되지 하게 되고...
- 기분은 어땠나?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
-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자나?
10~12시 사이에 일어나고 1~3시 사이에 잔다
- 약을 좀 더 처방하겠다 저번에 아르바이트 하겠다고 한 거는?
안 할려구요
- 왜?
힘들 것 같기도 하고 주저리주저리
- 생각하지 말고 일단 실행하고 너무 힘들다 싶으면 그때 그만두면 된다. 생각보다는 그냥 먼저 해야한다.
알지만 잘 안 된다. 그리고 너무 가까워서 관두고 나면 다시 가기가 좀 그럴 것 같다
- 그건 그렇다. 조금 떨어진 데서 찾아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운전 학원 다니고 이러는 건 아주 좋다


에스시탈로프람정 10mg, 아빌리파이정 1mg, 하이라제정, 브로마제팜정 3mg 1/4



정확히 2019년 5월 24일까지 진료를 받으러 갔다.


약 2년 간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30점이 넘게 나왔던 주관적 우울감 테스트가 10번째 진료쯤에는 20점 정도로 떨어졌으니, 우울증 치료가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초반에 약을 챙겨먹는 게 익숙하지 않을 때에는 일주일 가량 약을 놓쳐서 심한 어지럼즘에 발열까지 난 적도 있고, 정신과 치료가 처음이라서 처방 면에서도, 진료 면에서도 여러 가지 시행 착오가 많았다.

병원이 사는 곳에서 너무 멀었던 것도 문제였다. 매번 서울까지 오가기가 고역스러워서 내적으로 울면서 기어가는 기분이었다.


우울 사고의 부정적인 연쇄를 영어로는 하강 곡선(downward spiral)이라고 표현한다.


5월 24일의 진료를 마지막으로 나의 사고는 심각하게 하강한 (spiralling) 끝에, 최악의 우울 삽화(depression episode)를 겪게 된다.

집에서 누워만 있었고 외출하지 않았다. 즉, 병원을 가지 않았고, 갑자기 단약했고, 2년간 유지했던 우울증 약을 끊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원인으로,


그 결과 경조증 삽화가 발생하고 만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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