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달의 하루 속에서
막차를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처럼 하루를 마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개찰구를 통과했다. 여행을 다녀오고 간만에 출근하니 몇일간 조금 피곤했다. 나 역시 피로가 풀리지 않았고, 같이 막차를 내린 피곤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대략 ‘야근과 술에 취해 지친 표정일테지’ 라면서 서로 다른 출구로 향했다. 비록 서로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지만, 오늘 하루를 마지막으로 부대낀 사람이 된다. 막차를 타야만 주어지는 사실이다. 사뭇 역설적이다. - 집을 향해 역의 계단을 올랐다. 피로가 쌓인 몸은 제멋대로 계단의 숫자를 과장해서 계산하곤 한다. 곧 이어지는 ‘이럴때 아니면 운동은 언제해’ 라는 생각은 바쁜 삶의 무의식이 낳은 의식이다. 그만큼 여유가 사라진 삶을 산다는 것은 이렇게 문득 찾아온다. 무의식적 의식, 피로의 세상에 살고있다는 방증이다. 물론 계단을 오르며 숨이 가빠지기 시작할때, 이 과정은 아무생각없이 걷는 행동으로 치환된다. 무의식이 의식을 잉태하는 과정은 이 세상을 바쁘게 산다는 것만으로도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더라. - 계단을 전부 이겼다. 출구를 나오는 순간은 하루의 투쟁에서 가장 의미있는 순간이다. 하루의 고생을 마친 셈이다. 그래서 올랐다는 표현이 아니라, 이겼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렇게 자연스레 출구를 나오려다, 공중의 빛이 강해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놀란건, 하늘이 어두컴컴하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의 분기점, 정각을 넘은 시각이었다. 새벽을 향하는 밤이 어두운건 당연한 사실이기에. - 달이 가로수 틈을 가득 채워 빛내고 있었다. 눈에 보인 광경이 예뻐서, 허겁지겁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다른 곳은 다 어두컴컴한데, 가로수 사이의 비좁은 틈을 용케도 알고 달빛이 그 속을 빼곡하게 빛내고 있었다. 사진을 몇장이나 찍어댄 후에, 이 순간에 대해 글을 쓰고싶었다는 생각과 함께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의 기억은 몇일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작성 중이다. 순간의 연장, 거창해보이지만 생각보다 별거 없다. - 해와 달의 물리운동을 생각했다. 이 둘의 물리운동이 만드는 하루를 살면서 깨달았다. 해가 떠있는 낮은 빛이 강하면 구석에서 그림자를 품고, 달이 떠있는 밤은 어둠이 강하면 구석에서 빛을 품는다. 두 녀석, 서로 죽을 둥 못내 물러나며 하루를 내어주면서도, 죽어도 지기는 싫은가보다. 어쩌면 이 둘은 서로의 편린을 한 조각 쥐어준 셈이다. 생각보다 이상적인 상관관계이며, 가히 로맨틱한 것이다. - 힘들어도 항상 죽으리라는 법은 없다. 밝은 낮이 어느 구석에서 그림자를 품듯이, 밝은 사람도 분명 구석에서 어두운 고민을 품고 있으리라. 어두운 밤에도 구석 한편에서 조명이 소중한 것처럼, 어두운 사람도 분명 어딘가에 밝은 희망을 품고 있으리라. - 힘들어도 항상 기도 한번을 안했다. 신은 믿지 않는다. 차라리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같은 역사적인 철학자들의 실존철학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사람에게 의존이라는 것을 많이도 지독하게도 하는 것 같다. 사람은 힘들면 무언가를 믿고 따르며 의지한다. 기생충의 생존방식과 닮았다는 점에서, 이는 끔찍히도 사실임에 놀란다. - 어찌됐든 밝아도 어둡고, 어두워도 밝다는 것이다. 적어도 크기와 깊이, 길이는 다르겠지만 그 어느 곳에서는 그렇단 말이다. 힘들어도 항상 죽으리라는 법은 없다. 달이 고개를 내밀고 쳐다볼 때가 반가웠던 이유다. 내가 힘들땐 틈을 찾아 빛을 내거나 찾으면 되고, 밝을 땐 그 틈의 어두움을 조심스레 경계하면 된다. 오늘도 늘 그렇듯이 밤을 보내고 낮을 기다린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간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