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리옹Lyon] 02
2달 간의 휴가를 받고 가장 처음 떠오른 건 '도망'과 '도피'였기 때문에 일단 한 달은 한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의 휴가 시기가 회의에서 확정되고, 알음알음 휴가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이 휴가 때 계획은 뭔지, 여행 갈 예정인지를 물어오면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정한 거 없는데요' 혹은 친분이 있는 경우 '일단 로밍되는 곳으로 도망갈 거야', '한 달 살기 해보려고' 정도로만 답했다. 실제로 구체적으로 도망/도피처를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그냥 한 달 동안 오키나와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키나와.
항상 오키나와를 생각하면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지면에서 뜨자마자 안도를 느끼며 눈물을 흘린 일, 다카에에서의 첫날밤 말도 안 되게 빛나는 별 때문에 잠에서 깬 일, 헤노코 숙소에서 혼자 있던 그 공간의 느낌과 냄새, 듀공이 보이는 언덕에서 바라본 탁 트인 바다와 햇살, 이에지마 숙소 주인과 밤 중에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고 거리를 달렸을 때 들리던 서로의 목소리와 얼굴에 닿은 바람, 20대 초반 나를 보듬어준 사람들과 아침 일찍 헤어지고 국제거리를 걸어 숙소로 되돌아올 때 태풍 걱정에 로손에서 구입한 신문의 냄새, 거리의 한적한 느낌과 촉촉한 공기가 떠오른다.
이것들은 2013년 그 일 이후 오키나와 여행(사실상 도피) 2주 조금 넘는 기간 동안의 가장 강렬한 기억의 조각들이다. 그리고 5년 뒤인 2018년에 다시 한번 오키나와를 여행(사실상 도피2)했다.
오키나와는 나에게 많은 위로를 주는, 내가 정말 편하게 느끼는 특별한 장소이지만 이번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오키나와가 와 닿진 않았다. 한국에서의 일상을 똑같이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럴 거면 한국에 있는 게 낫지.
도무지 내 생각을 모르겠어서 일단 '한 달 살기' 검색. 그러나 내가 보고 싶은 결과는 출력되지 않았다.
'한 달 살기'의 경험이 많이 기록된 국가는 태국, 필리핀 등과 같은 따뜻한 동남아시아. 그리고 일본(후쿠오카, 오키나와), 괌, 하와이, 부다페스트, 베를린, 파리 등의 장소들이었다. 근데 다 가보고 싶진 않았다.
온라인 상 기록된 '한 달 살기' 후기의 대부분은 자녀/본인 어학연수, 가족과 여행, 1달간 현지 업무, 한 달 동안 주변국을 여행하는 꿈과 희망과 로망 혹은 실패로 씁쓸한 경험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이 휴가를 1개월 단위 이상으로 받는 경우가 많지 않고, 나처럼 도망/도피를 하기 위해 혼자 한 달 살기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거나 혹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며칠 후,
출장과 회의가 많아 데스크 업무와 협업의 효율성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때 읽었던 최두옥 님의 '일하는 방식의 뉴 노멀, 리모트워크'(2018. 퍼블리PUBLY)의 그곳이 떠올랐다.
로테르담Rotterdam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도시였던 로테르담. 개성 강한 아름다운 건축물, 글에서 읽고 경험해 보고 싶었던 코워킹Co-working 공간들,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지만 영어로 소통이 원활한 네덜란드의 도시.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로테르담, 너로 정했다.
휴가 기간 중 한 달을 보낼 시기도 확정했고, 마침 로테르담까지의 원하는 일정의 항공권도 있다.
한 달 동안 외식만 할 수 없으니 요리를 할 수 있는 에어비앤비AirBnB를 찾아보고, 로테르담 여행기, 생활기 글을 읽으며 로테르담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근데 며칠 찾아봐도 마음에 드는 숙소가 영 없다.
내가 정한 숙소 금액(최대 1백만 원 전후)으로 한 달간 체류할 수 있으면서, 프라이팬으로 재료를 지지고 볶을 수 있는 주방이 있는 공간이 없다. 교통편이 비록 불편해도 나에게 시간은 많으니 괜찮고, 내가 비록 인간을 싫어하지만 공간만 좋다면 호스트와 함께 생활할 준비도 되어 있었는데 내 조건에 맞는 공간이 없다.
물론 마음에 드는 공간은 있었으나 침실 2개가 딸린 집 한 채를 빌려야 했기에 예산과 잉여 공간이 아까워 선택할 수 없었다.
숙소를 찾다 새벽 3시에 잠들기를 며칠. 다른 지역의 에어비앤비는 시설과 가격은 어떤가 싶어 살짝 눈을 돌렸는데, 가까운 독일만하더라도 비슷한 조건으로 숙소 가격이 낮아지는 것을 확인하고 '내가 왜 로테르담에 가기로 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로테르담이어야 할까?
내가 로테르담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글을 다시 정독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문장들이 머리에 와 콕콕 박혔다. 저자는 스마트워크와 삶을 위한 기준을 정해 도시가 이를 충족하는지 검토했고, 그 결과에 따라 도시를 결정했다.
그에 반해 나는 어느 것에 대해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정하진 않았지만 내가 왜 그곳에 가야 하는지 묻기 시작했다.
Do you know what you want?
애정 하는 원데이 앳 어 타임One day at a time(넷플릭스Netflix)의 에피소드 중 페넬로페가 자의 반 타의 반인 상황을 겪으며 이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며 저녁시간을 보내다 마지막 장소인 식당에서 웨이터에게 들었던 한 마디. "원하는 건 정하셨나요?Do you know what you want?"
나는 원하는 걸 정했던가?
나는 무엇을 하러 여행을 가는가?
나는 정말 로테르담에 가고 싶은가?
가끔 나 자신을 반영하지 않은 즉흥적 결정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나의 까다로움을 반영한 기준에 충족하는 결정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과 함께 있는 게 싫다. 혼자 있는 것이 편하다.
쉰다는 건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 있는 것이다.
화장실을 혼자 쓰고 싶다.
요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책상이 있거나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소파가 있어야 한다.
대중교통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위의 기준을 보면 나에게 숙소는 여행의 질, 나아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기준 목록에서 혼자 있고 싶다고 3번이나 말하고 있어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숙소는 사실 절대로 선택하면 안 된다. 현재 상황에서 원하는 숙소를 구할 수 없는 로테르담은 다음 기회에.
기준을 정하고 난 후 본문에도 적혀 있었던 다른 도시, 프랑스 리옹Lyon이 떠올랐고 에어비앤비에서 검색 후 2, 3번째로 확인한 숙소가 마음에 들어 바로 예약, 결제했다.
숙소의 사진 한 장을 보았을 때 '여기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그리고 그전까지 2달 휴가, 한 달 살기, 해외여행에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내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글은 이렇게나 길지만, '로테르담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글을 다시 정독했다'부터 위 문장인 '결제했다.'까지 실제로 3시간 걸렸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당시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로테르담으로 결정할 때의 상황과 정말 똑같은 즉흥적 결정이다.
다만 이번에는 설레기 시작했다는 것 만 다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