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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공이 Apr 20. 2019

0시의 감정 폭풍

한 달 [리옹Lyon] 03

  여행지를 결정하고 한 달간 머물 숙소를 예약, 결제하는데 3시간, 항공권 결제까지는 하루가 걸렸다.

그저 사진 속의 책상 앞에 앉고 싶어서 예약하고 결제까지 순식간에 마쳤다.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파업, 언어, 혁명,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파리Paris,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마리옹 코티야르Marion Cotillard, 루브르 박물관 정도였고 리옹은 숙소를 예약하기 직전 잠깐 검색한 게 전부였다. 

  프랑스에는 가본 적도 없고 그곳에서 여행이나 생활을 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2백 5십만 원 넘는 금액을 결제하고 나서야 뭐라도 검색해서 뭐라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극단의 정보가 나를 맞이했다

  단지 '프랑스 물가', '에어프랑스 후기', '에어비앤비 후기', '한 달 살기 후기'를 검색했을 뿐인데 중간은 없는 양극단의 정보가 담긴 엄청난 양의 검색 결과가 출력됐고, 예상치 못한 결과에 어안이 벙벙했다.

  정보가 넘쳐흘러 허우적 댈 수밖에 없었고, 언제나 최악을 먼저 생각하는 성격 특성상 부정적인 글들만 눈에 쏙쏙 들어왔다.


  프랑스, 특히 파리의 도난(소매치기 등) 문제에 대해서 가장 많은 결과가 출력되었고, 정보의 양극단이 심했다. 공항 주차장을 벗어나기 전에 모든 짐을 도난당하거나, 공공장소에 가방, 휴대폰을 도난당하거나, 혹은 도난당하기 직전에 알아차리고 저지했거나. 그리고 아무것도 도난당하지 않고 여행했거나.

  프랑스의 소매치기 등 도난 문제에 대해서는 지인들의 경험담도 들어봐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다양한 사례(?)와 수법을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문제에 대해서 주의를 하고 있는 글이나, 아무것도 도난당하지 않은 글들의 말미에는 대부분 '정신을 바짝 차리면 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근데 이게 정신 바짝 차린 다고 될 문젠가?


  내가 곧 이용하게 될 에어프랑스나 에어비앤비의 불쾌한 경험, 영어가 통하지 않아 고생한 경험, 공공장소에서의 캣 콜링Cat calling*,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 발언에 대한 경험 등 내가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내용도 많이 읽어 볼 수 있었다.

      * 캣 콜링: 거리에서 주로 남성이 낯선 여성에게 느닷없이 인사나 친근감, 칭찬을 가장한 성희롱 언행을

         하여 불쾌감을 주는 행위를 이른다. (페미위키)


  에어프랑스와 에어비앤비는 이번에 처음 이용하는 거라 유독 눈에 착착 감기는 부정적인 글을 읽고 나의 선택이 잘 못 된 것만 같아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환승 항공편을 이용해야 하는데 비행기 연착/지연이 되면 어쩌지, 수하물이 분실되면 어쩌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추가 결제가 되면 어쩌지, 숙소가 사진과 다르면 어쩌지, 나는 아무것도 훼손한 게 없는데 보증금이 징수되면 어쩌지 등.

  지출한 돈의 크기만큼 걱정과 불안이 커져만 갔다. 게다가 이어지는 결과 페이지들은 나에게 더욱 부정적인 고민만 안겨주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읽었던 모든 사건과 사고들이 전부 나에게 일어날 것만 같은 걱정에 0시에 시작된 부정적인 감정 폭풍이 잦아들지 않아 선잠이 들었다가 새벽 2, 3시에 다시 일어나 걱정하는 게 반복되었다.

  아무리 호불호가 명확한 곳이라지만 사람들은 도대체 이 곳에 왜 가려고 하는 거지? 21세기인데도 탈아입구脱亜入欧 하고 싶어 하는 건가? 소매치기와 수하물 분실로 소중한 한 달을 망칠지도 모르는데 어떡하지? 쉬러 갔다가 스트레스, 고통만 받고 오면 어쩌지?

  나는 왜 돈 써가며 스트레스받고 있는 거지? 이러다 바로 스트레스/우울의 2단계로 진입해 버릴 것만 같았다.

 


  침착했더니, 그제야 폭풍이 멈췄다.

  사람 사는데 다 똑같고, 조금 길게, 하지만 잠깐 여행하는데 이렇게까지 불안을 느낄 필요가 있나 싶어 조금 침착해보기로 했다. 이 미친 듯한 정보 과잉 세상에서 침착하지 않으면 더욱 휩쓸려 불안을 뛰어넘는 다른 감정과 만나게 될 것 같았다.


프랑스에는 사람이 많이 온다. 사람이 증가하면 사고나 문제도 비례하여 증가하는 게 당연하다.

허브공항의 경우 규모가 크고 항공편이 많아 항공편 지연, 수하물 분실의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경험 속에서 원인이 될 수 있었던 본인의 행동을 제외하고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읽은 글들을 통해 예상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대처방안을 미리 마련할 수 있다.

어제는 그랬지만 오늘은 아닐 수 있고 내일은 또 다를 수 있다.


  혹자가 보기에는 정신승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보 과잉 상황에서 나에게 유효한 정보를 재구축하는 게 필요했다. 그리고 일련의 상황에서 수 십 개의 글을 읽고, 무의미한 단어 수 백 개를 삭제해야 나에게 필요한 두 개의 단어를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싸 데뻥ça depend


  리옹에서 시내 투어를 할 때 가이드 님께 처음 듣게 된 싸 데뻥ça depend. 올바른 표기법은 무엇인지 궁금해서 검색해보다가, 프랑스와 싸 데뻥에 대한 글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글이 프랑스는 싸 데뻥의 나라라는 게 골자였다.

  싸 데뻥은 It depends on. 한국어로는 경우에 따라, 그때그때, 혹은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 나 닝바닝닝겐 바이 닝겐

  사람들이 주로 말하는 '프랑스는 싸 데뻥의 나라다'에서의 싸 데뻥은 닝바닝, '사람에 따라'가 되겠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 모든 정보(경험담, 후기)는 싸 데뻥이었고, 내가 앞으로 겪을 모든 것도 싸 데뻥이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 다른 사람과의 다양한 인과관계와 오해, 자연의 흐름과 시간이 얽히고설켜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일률적으로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없다.

  

  지금까지 리옹에서 지내면서 소매치기, 캣 콜링, 인종차별을 당한 적 없다.

  에어프랑스를 쾌적하게 이용하여 후기까지 남겼고, 수하물은 잘 도착했다. 샤를 드골 공항-생텍쥐페리 공항까지 1시간 이상 지연은 있었으나, 인천 공항-샤를 드골 공항 간 항공기의 지연은 없었다.

  에어비앤비 숙소는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하며, 게시된 설명보다 더 많은 것들을 나에게 제공하고 있다. 숙소 사진과 실제 모습은 똑같으며, 호스트는 항상 답변이 빠르고, 내가 잘 지내는지 먼저 안부를 물어온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빵집에 대해 '종업원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고, 손님이 있는데 휴대폰을 보고 있느라 주문을 받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프랑스 사람들의 후기를 읽었지만, 빵은 먹고 싶었고 좀 더 멀리 있는 빵집에 가기 귀찮았기에 한껏 긴장한 채로 빵집에 갔다.


   |   프랑스 대부분의 빵집의 빵들이 유리장 뒤에 있어 매장 직원에게 직접 빵을 주문해야 한다. 

       손가락으로 가르켜서 주문할 수도 있겠지만, "숫자/빵 이름/실 부 쁠레"라는 말로도 주문할 수 있다.


  내가 주문할 차례가 되자 매장 직원은 나의 인사를 친절하게 맞받아주었고, 외운 게 한 껏 티 나는 나의 '까트흐 크와쏭 실 부 쁠레'를 알아듣고는 바로 크루아상을 4개를 종이백에 담아주었다. 그리고 매장의 다른 직원도 다음 사람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주문을 받았다.


  프랑스에 도착한 후 내가 읽었던 경험/후기들과는 다른 경험을 하고 있지만, 내일부터는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의 즐거운 경험을 통째로 끌어내리는 불쾌한 경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인생 여행지'로 등극할 정도의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의 이 경험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도,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상황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다소 당연해 보이는 진부하지만, 최고와 최악, 양극단의 정보에서 나에게 유효한 정보만 추린 뒤 잘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말고는 내가 먼저 걱정한다고 먼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생각보다 많이 없다.


  이렇게 글은 썼지만 아마 이런 비슷한 부정적 정보 과잉 상황에 또다시 노출이 된다면 잠 못 이루는 0시의 감정 폭풍에 휘말릴 것이다. 아마 이는 변치 않을 것이고, 계속 반복될 것이다.

  다만 그때는 우연하게라도 이 글을 읽게 되었으면 좋겠다.


걱정해봤자 싸 데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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