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이 세상에 나온 아기 돼지 삼 형제는 무럭무럭 자라났고, 영원히 초보 엄마일 것 같았던 나는 어느덧 칠십 할머니가 되었다.
나는 웬만해서는 어떤 일을 하고 후회를 하지 않는 성격이다. 막상 닥친 일에 최선을 다하고 뒤돌아 보지 않는 성향 탓일 것이다. 그럼에도 칠십이 되도록 마음속에 후회되는 일이 딱 하나 있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여전히 마음에 남아있다.
막내 소연이 이야기다.
소연이는 아기 돼지 삼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소연이를 출산했던 때는 내가 서른 살이 넘었을 때다. 지금이야 마흔이 훌쩍 넘어서도 출산을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의학기술도 지금과 같지 못했다. 약 40년 전만 해도 서른 살이 넘어 출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병원에서는 아주 위험한 노산이라 했다. 다행스럽게도 막내 소연이는 임신에서 출산 때까지 입덧을 하지 않았다. 포동포동하고 건강하게 태어난 소연이는 우리 가족에게 많은 기쁨을 안겨 주었다. 소연이가 태어나고 우리 집에 남편 승진 등 좋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소연이를 복덩이라고 불렀다.
소연이가 세 살이 되었을 때였다. 남편 근무지 변경으로 고창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고창에서는 그나마(?) 넓은 집에 살았지만 높은 물가를 자랑하는 서울에서는 택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 가족은 경찰서 앞에 있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무척 낡은 주택 2층에 겨우 세를 얻을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꽤나 쪼들리며 살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아이들이 세 살, 네 살, 여섯 살.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때였기에 직접 밖에 나가 일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을 찾았다. 살았던 곳 주변에는 공장들이 많았다. 집에 있는 주부들은 집에 앉아서 볼트 끼우는 일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1층 주인댁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이들 과잣값이라도 벌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볼트 끼우는 부업을 야심 차게 시작했다.
낮에는 아이들과 놀며 2층 평상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볼트를 끼웠다. 아이들이 잠든 밤에도 볼트 끼우기는 계속되었다. 집에서 하는 일이라 아이들 생활에 특별히 지장을 주지 않아서 좋았다.
그날도 아이들이 잠들고 새까만 밤이었다. 부엌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볼트를 끼우고 있었다.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난 듯 싸한 느낌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곧 다리에 거대한 통증을 일으켰다.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모두 자고 있었고, 남편은 잠복근무 때문에 2주일째 집에 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다리에 힘을 주고 화장실에 가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다리에는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고, 내 몸의 일부가 끊어진 것 같은 상태가 지속되었다. 혹시나 아이들이 깨서 놀랄까 봐 끙끙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지 못하게 입을 막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서 전해오는 통증 때문에 땀이 계속 이마 위에 흘러내렸다. 밤새 고통 속을 헤맸다. 안간힘을 쓰다 날이 밝았다.
남편은 둘째 아들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계셨다. 어머님은 풍으로 다리가 아프셨기 때문에 서울로 이사 올 때 우리와 함께 올라오게 되었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집은 너무 비좁아 시부모님들이 누울 자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서울에 형님이 계셨다. 형님은 서울에서 이미 자리를 잘 잡은 상태였고, 60평이 넘는 양옥집에 살고 있었다. 우리와 형님댁은 가까웠다.
임시방편이라 해야 할까. 시부모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우리 집에서 생활하셨고, 잠은 형님댁에 가서 주무셨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아침마다 형님 집으로 가서 시부모님들을 모셔와 우리 집에서 식사를 챙겨드려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것이 평소 일과였다.
그날 아침도 시부모님을 모시러 가야 했지만 동이 틀 때까지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둘째 며느리가 오지 않지 화가 난 시아버님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치셨다. 시아버지는 부엌 구석에서 밤새 땀을 뻘뻘 흘리며 진을 빼고 있는 나를 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형님 집으로 돌아가셨다.
‘아가야, 어디가 아프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신 아버님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아버님이 형님댁으로 가시고 아이들이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엌에서 땀을 흥건하게 흘리고 맥이 빠져 있는 엄마를 보자 현정이, 종호, 소연이가 놀라 울면서 말했다.
“엄마! 어디 아파?”
세 아이들은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나도 울면서 말했다.
“아니 엄마 괜찮아 울지 마 엄마 조금 있으면 괜찮으니 울지 마”
아이들한테 울지 말라고 하면서도 내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렀다. 눈물도 부족하여 콧물까지 흘러내렸다. 내 모습을 본 현정이는 화장실에 가서 화장지를 뜯어와 엄마 코를 닦아주었다. 그때 현정이 나이 4살이었다. 현정이는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땀으로 내 얼굴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도 귀 뒤로 말끔하게 넘겨주었다. 아이들을 보자 작고 작은 세 아이들이 마치 든든한 버팀목처럼 느껴졌고,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마음에 더 눈물이 났다.
한 시간이 조금 지나 시어머니께서 시아버지 부축을 받으며 우리 집으로 오셨다. 당시 시어머니는 중풍으로 손과 발을 떨며 걸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집까지 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 같다.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직접 우리 집으로 오셨지만 당시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종호, 현정이, 소연이가 할머니 할아버지께 말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가 밥 드릴게요”
종호가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려고 하자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종호야 할미 밥 먹었다. 괜찮다. 너희들 밥 먹었냐?”
종호, 현정이가 대답을 하였다.
“우리는 밥 먹었어요. 엄마는 밥 안 먹었어요”
“할미 엄 ~~ 마 아파 아아앙~~~”
“으아앙 으아앙”
갑자기 종호, 현정이 소연이가 큰소리로 울면서 말했다.
“엄마 아파요 “
”그래 그래 엄마 많이 아팠구나 “
”네 “
종호, 현정이 소연이는 할머니가 하는 말씀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셋이 합창을 하듯 대답을 하였다.
시어머니 시아버지는 내 몸 상태를 보시고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정읍에서 살고 있는 큰 시누이집으로 가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어미야 우리 내일 정읍 내려가마 정읍 내려갈 때 우리가 소연이를 데리고 내려갈 테니 몸 치료 잘해라, 종호야 현정이는 엄마 옆에서 엄마 돌봐드려라. 엄마 나으면 그때 서울 올라오마 “
소연이는 할머니의 말씀 뜻을 모르니까 오빠 언니 따라서 큰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네 할머니 “
그날, 세 살 소연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 정읍으로 내려갔다.
당시 고모네집에는 아직도 어르신들이 갓을 쓰고 있었고, 아이들에게 엄격하게 예절을 가리키는 집안이었다.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소연이는 철든 아이처럼 울지도 않고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갔다고 한다. 뭐가 아련한지 어린 소연이는 뒤를 자꾸 돌아봤다고 했다. 어머님께 이 말을 전해 들을 때 소연이한테 너무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3살 된 소연이는 그 어느 때 보다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할 나이에 가족을 떠나 정읍에 살고 있는 큰 고모네집으로 갔다. 그것도 종갓집 큰집.
하늘이 도운 것일까 일 년 동안 병원을 다니며 꾸준히 치료를 받았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치료한 후 걷게 되었다. 그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이제는 되었다 싶어 시골에 연락을 하여 소연이를 데리고 올라오시라고 연락을 하였다. 시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응 자넨가 날세 낼 1시쯤 어머니랑 소연이랑 아버지 올라가니까 서울역으로 마중 나가소”
“네, 형님 알겠습니다”
막내 소연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한달음에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서울역 앞에서 만난 소연이는 4살이 되어 있었다. 고모는 어린 소연이에게 예쁜 한복을 입혀서 올려 보냈다. 서울역에 도착한 소연이는 예의 바른 어른처럼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인사를 하였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소연이 왔습니다 “
”오~ 오 우리 소연이 왔구나 “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네 살 소연이를 껴안고 펑펑 울었다. 이 어린애한테 얼마나 규칙을 가리켰으면 어린것이 애기답지 않게 인사를 한단 말인가. 1년 동안 소연이를 돌봐준 시누이 가족에게 고마운 것이 아니라 화가 나서 어머니께 말했다.
”어머니 지금 소연이한테 ~~~ 이 어린것한테....... 어머니는 지켜만 보고 계셨어요 대체 어른들이 ~~ 내가 미쳤지 미쳤어.... 내가 데리고 있었어야 하는데... 소연아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미안해 “
”어미야, 그래도 소연이 그곳에서 한 번도 울지도 않았고, 투쟁도 안 했다 뭘 그렇게 까지 속상해하냐~~~“
나는 소연이에게 말했다.
”소연아 나는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야 자 엄마 엄마 해봐 어서 해바 “
”엄마 으앙 엄마 엄마엄마 아아아 아아앙 “
”그래 그래 소리 내서 울어 소연아 울고 싶은 만큼 울어 아아앙 “
나와 소연이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소연아 이제 엄마가 많이 아파도 절대 고모집에 안 보낼게 앞으로 아빠랑 오빠랑 언니랑 엄마랑 소연이랑 행복하게 사는 거야 알았지 “
”네 좋아요 “
소연이는 웃으며 내 품에 안겼습니다. 나는 소연이를 등에 업고 집에까지 오는 동안에 소연이는 1년 만에 만난 엄마 등에 얼굴을 묻었고, 긴장이 풀렸는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소연아 예쁜 꿈 꾸어라, 예쁜 딸 미안해 사랑해’
아침이 되었다. 소연이가 오빠와 언니를 불렀습니다.
”오라버지. 언니“
”소연아 오라버지가 아니라 오빠 오빠 해봐 하하하“
”오빠 해해해 오빠 “
그 말에 소연이는 히죽히죽 웃으며 오빠하고 부르며 얼굴빛이 복사꽃처럼 화사하고 예뼜다.
오빠의 농담에 소연이는 이제 애 어른이 아닌 4살짜리 아이로 돌아왔다. 이제는 장난 삼아 오빠보고 오라버지 오라버지 하며 웃으며 장난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 일화는 벌써 40년 전 일이다. 당시 너무 몸이 아파서 아무런 생각 없이 아이를 고모집에 맡기게 되었지만, 1년 만에 변해버린 딸 소연이를 보고 후회를 많이 했었더란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때 잃어버린 1년의 기억이라고 답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막내딸 소연이에게 말하고 싶다.
"소연아 미안해 지금까지도 한 번도 미안하다고 못했지만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 그때는 엄마도 갑자기 앉은뱅이가 되자 이성을 잃었던 것 같아. 소연아, 예쁘게 자라줘서 정말 정말 고마워. “
그렇게 작고 어렸던 막내 소연이는 이제 엄마가 되었다. 여섯 살이 된 손자가 해맑게 웃고 뛰어노는 모습을 보니 어릴 때 소연이 생각이 난다.
오늘은 세 살이었던 막내 소연이를 꼭 안아주고 싶은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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