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학교와 사회가 말하는 ‘스펙’의 미로에서 길을 찾는 법
“이 자격증 하나만 더 따면 될 것 같아.”
“학점을 조금만 더 올리면 안정권이지 않을까?”
“어학 점수도 함께 높여야 하나…?”
대학 캠퍼스에서 흔히 들려오는 자조 섞인 대화들입니다. 책상에 앉아 밑줄을 긋고, 인터넷을 뒤져 필요한 ‘스펙(spec)’ 정보를 모으는 모습은 이제 너무나 익숙하죠. 마치 성공으로 가는 정확한 지도라도 존재하듯, 우리는 구직 사이트나 취업 설명회를 기웃거리며 새로운 ‘스펙’을 찾아 헤맵니다. 그런데 정작 그 길로 한참을 달려가 보면,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공허가 찾아오곤 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얻으려는 건 대체 뭘까?”
스펙에 대한 강박은 대학생뿐만 아니라, 사회 초년생이나 경력 전환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도 주홍글씨처럼 따라붙습니다. 아무리 많은 자격증을 모아도, 세상은 언제나 “아직도 뭔가 부족하네”라며 한 발짝 더 나아가라 재촉합니다. 문제는 이런 재촉이 꼭 ‘이력서가 더 완벽해야 한다’는 목표로만 귀결된다는 점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가?” 하는 본질적 질문은 뒷전이 되고, ‘더 높이, 더 많이, 더 새롭게’라는 외침만 울려 퍼지죠.
특히 정신 장애를 겪고 있는 경우라면, 이 상황은 훨씬 복잡해집니다. 기분이나 에너지가 예측 불가능하게 변동될 수 있고, 심리적으로 과부하가 왔을 때 정상적인 학업이나 업무 수행이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나 사회가 제시하는 스펙 공식에는 이러한 ‘개인별 변동성’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왜 제때 과제를 못 했어?” “왜 집중력이 이렇게 떨어졌어?”라는 말이 의아해 보일지 모르지만, 정신 장애를 가진 입장에선 작은 일조차 우주가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죠. 이럴 때 ‘스펙 쌓기’라는 압박은 육체적·정신적으로 이미 지친 상태를 더더욱 몰아세우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 저는 제 자신에게 문득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토익 점수는 900이 넘고, 전공과 관련된 자격증도 몇 개 땄는데… 왜 나는 여전히 막막할까?” 저a는 서류 전형에서 줄줄이 합격 소식을 듣고도, 정작 면접장에 들어가면 말문이 막혀버리곤 합니다. 면접관이 “우리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나요?”라고 물었을 때, 스스로 진짜 원하는 일을 설명하지 못하겠더라는 겁니다. 얼마 뒤 내 자신에게서 깨달은 점은, “사실 내가 조울증으로 몇 달씩 심리 상담을 받아왔는데, 한순간에 평정심이 깨져 버리면 어떡하나 두려워서 면접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었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아무리 스펙이 화려해도, 정신적 안정이 흔들리면 본인을 어필하기조차 쉽지 않은 법이죠.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건, ‘스펙’이라는 건 결국 표면적인 지표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학점, 자격증, 어학 점수 등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이 곧바로 내 역량이나 가치관을 대변해주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정신 장애를 겪는 사람이라면, 집중력이나 실행력이 좋았던 날의 결과물로만 평가받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한 번의 과도한 스트레스가 쌓여 며칠 혹은 몇 주를 누워 지내야 할 때, “왜 공부나 준비를 더 하지 않았냐”는 사회의 질문은 본인에게는 차마 말 못 할 고통을 떠올리게 만들기 십상이거든요.
그렇다면 이 미로 같은 ‘스펙’ 경쟁에서, 게다가 정신적 어려움까지 안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우선, 내 몸과 마음의 리듬을 살펴보는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定常) 상태’에 꼭 맞추려고 애쓰다 보면 스스로를 지나치게 몰아붙이기 쉽습니다. 오히려 오늘이 ‘버티기 힘든 날’이라면 잠시 쉬어가고, 다른 날엔 비교적 에너지가 충만할 때 집중해서 나만의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등, 유연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관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더디게 보여도 멈추지 않는’ 나만의 루틴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스펙이 부족하다”든가 “정신 장애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그 판단을 무작정 받아들이기보단 자신의 스토리를 만들어갈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내가 왜 이 길을 택했는지, 어떤 한계를 느꼈고 어떻게 극복하고자 노력했는지, 그리고 정신 장애가 어떻게 나만의 감수성과 사고방식을 키워줬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한 줄 스펙보다 훨씬 강력한 어필이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창의성을 발휘해 재미있는 앱을 만들었다든지, 팀 프로젝트에서 파트너들의 정서를 세심하게 돌봄으로써 협업을 원활히 이끌어냈다든지, 조용하지만 진정성 있는 리더십을 발휘했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결국 학교와 사회가 말하는 스펙의 함정이란, 사람을 단순한 숫자와 타이틀로만 평가함으로써 그 안에 담긴 복잡하고 다채로운 삶을 간과한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정신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평가가 더 가혹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남들과 다른 속도로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서류 전형의 관문에 걸리더라도, 면접장에 들어가 떨릴지라도,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만이 경험한 독특한 통찰과 이야기는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미로처럼 보이는 스펙 경쟁 속에서, 느리게 가더라도 끊임없이 나를 탐색하고, 때로는 쉬어가며, 도전을 이어가다 보면 결국 자신만의 페이스를 찾게 됩니다. 정신 장애가 주는 흔들림이 때론 거슬러 보일 수 있지만, 그 흔들림 속에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섬세함과 관찰력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스펙’이라는 미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당신,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가능성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