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좋은데,

태어나 보니 제 인생이 시트콤 같지 뭐에요.

by Youhan Kim

“남자가 좋다는데, 인생이 드라마 아닌 시트콤이면 어때요.”


대학교 졸업 후 1년 동안 취업전선에서 바닥까지 구르다가 “이러다 더 우울해지겠다” 싶어서 3월 말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했어요. 주위 사람들은 “몸도 약한데 또 무슨 해외냐” 하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지만, 사실 저는 남성 동성애자 시스젠더이고, 양극성정동장애(조울증)와 희귀난치성질환자라는 ‘투머치’한 세트까지 장착했거든요. 대장을 통째로 들어냈을 만큼 몸 상태가 특이한데도, 오기가 생겨서 해외를 마구 떠돌아다녔어요. 말레이시아 1년, 미국 6개월, 베트남 3년 거주에다가, 싱가포르·스리랑카·팔라우·일본·중국·캐나다·태국·터키·불가리아 등등… 한 번 집을 나서면 거의 집에 안 돌아오는 스타일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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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릴 적부터 “난 남자가 참 좋네”라고 느끼긴 했지만, 사회적 편견이 워낙 무시무시해서 입을 꾹 닫고 살았어요. 근데 웃기는 건, 제가 혼자 비밀로 간직한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사람들은 진작 다들 눈치채고 있었다는 거예요. 중학교 때 혼자서 “나 동성애자 맞네”라고 깨닫고는 시리에 빠졌는데, 정작 제 친구들은 “어쩐지 네가 남자 아이돌 나올 때만 얼굴에 형광등 켜지더라”라며 시큰둥했죠. 작년에 부모님께 ‘드디어’ 커밍아웃했더니 “그거 이미 알았지”라고 하셔서 허무했답니다. 그러면 그렇지, 괜히 혼자 심각하게 끙끙 앓아봤자 가족 레이더는 다 뚫고 간 모양이에요.


첫 남자친구는 미국 군인이라니까 왠지 멋지고 박력 넘칠 것 같지만, 사실 Grindr로 만났고 첫 데이트 장소도 고깃집이었어요. 상상해보세요. 근육질의 미군(?)이 불판 앞에서 숯불을 뒤적거리며 “난 양념보다 소금구이를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요. 그걸 보면서 제가 ‘이 사람, 잘 맞는군’이라 생각했답니다. 근데 전역 후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고, 이후로도 두 번째 애인마저 같은 여자로 커밍아웃을 해버리니 “내가 혹시 여성성을 선호하나?” 고민에 빠졌어요. 결론적으론 “남자를 좋아하지만 무슨 성향이든 어때, 여성성이든 남성성이든 크게 상관 안 해”라는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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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엔 기독교 대안학교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거기서 이성애자 친구를 짝사랑했다가 번번이 어긋났어요. 그래도 지금은 그 친구랑 제일 친한 사이가 됐으니, 드라마로 치면 ‘연애는 못 해도 우정이 남았다’ 클리셰가 성립한 셈이네요.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를 여행했을 땐 미국 올란드 게이클럽 총기 난사 사건을 추모하는 행사에 참여해 눈물을 팍팍 쏟았어요. “아, 세상에 이런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나 혼자만 특이한 게 아니구나”라고 느끼니 묘하게 뭉클했고, 그날 밤엔 또 클럽에서 신나게 춤을 추며 다음날 무릎이 욱신거려 잠 못 이뤘죠. 역시 조울증 라이프는 기쁨과 슬픔이 한 세트라서 폭이 넓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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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대학 다닐 땐 기독교 사학 강의실에서 어떤 학생이 “야, 게이!”라고 저를 지목해 소리친 적도 있었어요. 그 순간만큼은 내 심장이 내려앉아 “땅굴이라도 파고 숨고 싶다” 싶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인생 망하지는 않더라” 하고 웃어넘기게 됐죠. 사실 목욕탕이나 샤워실에 갈 때면 아직도 “내가 게이인 거 티 나는 거 아니야?” 하고 괜히 긴장하는 습관이 있어요. 정작 주위 사람들은 저를 신경 쓸 겨를도 없는데 제가 혼자 작고 소심해지는 거죠. 그래도 가끔 “전 게이지만 걱정 마세요, 안 봐요”라고 농담을 던지면 상대가 피식 웃고 “그래, 걍 씻기나 하자”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서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가족성폴립증으로 대장 전부를 들어낸 상태라 남들보다 자주 화장실에 가야 하고, 배가 예민한 편이에요. “힘들지 않아?”라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맞아요, 힘들죠. 근데 이미 ‘난이도 최상’이면 “더 뭘 잃겠어?”라는 배짱이 생겨서 몸을 이끌고 다니는 거랍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도 사실 “어차피 집에 있어봐야 뾰족한 수 없는데, 그럼 차라리 해외에서 추억을 쌓자”라는 모토가 큽니다. 아프면 무시무시한 게 아니라 그냥 스펙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재밌잖아요.


제가 이런 이상한(?) 마인드로 살다 보니 주변에선 “너는 참 유쾌하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사실 못 웃으면 견디기 힘들어서 일부러 웃으려 하는 거예요. 종종 제 정신 상태가 널뛰기를 해도, “에라, 이 김에 즐겨보자” 식으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사는 맛이 난다고 해야 할까요. 남자가 좋고, 몸은 아프고, 사회 편견도 신경 쓰이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저만의 시트콤을 찍으니 하루하루가 못 볼 꼴도 많지만 웃을 꼴도 상당히 많아요.


3월 말에 호주행 비행기에 오르면 또 어떤 기상천외한 사건이 저를 맞이할지 궁금해요. “나는 호주에서…?” 하는 상상을 벌써부터 하고 있답니다. 아마 게이바나 클럽을 탐방하면서 “호주 사람들은 또 어떤 문화를 즐기나” 호기심도 많고, 가벼운 아르바이트 하다가 로맨스가 싹틀 수도 있겠죠 (희망사항). 어느 날은 또 “몸 컨디션 난리 나서 화장실에만 반나절 있었다”는 시트콤 한 회차를 찍을지도 모르고요.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들 전부 모아서 나중에 “인생, 너무 빡세지만 재밌게 살면 장땡”이라고 자랑할 생각이에요.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난 남들과 달라서, 혹은 몸이 아파서, 혹은 정체성이 특이해서 평범하게 못 산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그냥 웃읍시다!”예요. 진짜로, 울고만 있으면 힘이 더 빠지더라고요. 차라리 코미디처럼 희화화해버리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져요. 저는 이런 방법으로 버텨왔고, 꽤 효과가 좋았거든요. 나중에 호주에서 돌아오면 “이젠 시즌2가 아니라 시즌20까지 찍고 왔다”며 더 미친 듯한 에피소드를 풀어놓을지도 모르니, 그때도 같이 웃어주셨으면 해요.




제게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일상이고, 몸 상태가 워낙 들쑥날쑥한 탓에 인생이 늘 ‘재난 블록버스터’급이지만, 한 발 더 나아가서 스스로를 주인공 삼은 시트콤을 찍는다 생각하면 정말 견디기 괜찮아요. 이렇게 웃으면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도 감사해요.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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