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기까지’를 시작하면서
오래전 썼던 이 글들은 아직도 유효할까? 그 사이에 세상이 너무 달라져버렸다면?
염려하며 예전 글부터 천천히 올려보려고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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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방 정리를 크게 했다. 사실 물건들의 배치를 조금 바꿔 보고 싶었는데 가구들이 너무 크고 짐이 많아서 실패하고 말았다. 속마음으로는 방에 작은 침대를 하나 놓고 가구들도 통일감 있게 바꾸고 싶었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이사를 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해 보였다. 가구를 바꾸고 싶다고 말했더니 엄마가 말했다. “그냥 빨리 결혼을 해!”
엄마의 사고 흐름은 이렇다. 결혼을 하면 이사를 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가구들을 사겠지? 결과적으로 나는 새 침대도, 통일감 있는 가구도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결혼을 한다면!
결혼 적령기 여성의 삶에서 ‘결혼’은 일종의 결과값이다. 함수에 뭐를 넣든 간에 값은 항상 ‘결혼’이 나오고 만다. 물론 나는 내 한 몸 뉘일 침대 하나가 필요했을 뿐이다. 침대를 사기 위해 결혼을 할 수는 없으니 엄마의 제안은 정중히 사양했다.
왜 항상 결혼이라는 답이 나오는가. 이것이 일종의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면, 정해져 있지 않은 대답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물론 우리는 모두 답을 알고 있다. 그들은 ‘노총각’, ‘노처녀’가 되거나 약간 어딘가 부적합한 존재, 사회적으로 반쪽 어른이 되고 만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양육해야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난다는 암묵적인 룰을, 그래야 비로소 ‘철이 든다’는 법칙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예전에 어느 장애인의 이야기를 본 적 있다. 어릴 때 그는 성인이 되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티브이에서 한 번도 성인의 모습을 한 장애인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성인이 된 자신을 상상해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사회 안에는 ‘보통’,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존재와 범주가 존재하고, 거기서 벗어난 이야기들은 쉽게 사라진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반적 서사에서 벗어난 존재들은 어디로 갈까? 우주 어딘가에 있다는 잃어버린 실핀과 양말 한 짝의 나라처럼, 벗어난 존재들의 공간도 어딘가에 존재하는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한 곳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산다.
단일한 서사는 누군가를 배제한다. 우리가 ‘일반적인 생애주기’라고 부르는 서사(어쩌면 이제는 불가능해진),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은퇴하는 서사에 중고등학교만을 졸업하고 곧장 취업한 청년의 이야기는 없다. 그리고 이 서사에는 여성도 없다. 일단 여성은 졸업을 해도 취업하기가 어렵고,(이것은 통계가 증명한다) 아이를 낳으면 경력이 단절되므로. 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서사는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과 성소수자도 없다. 그런데 내가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예민하다거나 유별나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세상 혼자 사는 사람들이다.
일반 서사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그렇게 희귀한 경험이 아니다. 내가 청년 당사자로서 기본소득 운동을 하게 된 이유도 이런 배제의 경험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번도 친구들처럼 기업 공채에 응시하는 방식의 취업 준비를 해 본 적이 없다. 프리랜서로 일했고, 다른 상황들을 경험했다. 언론에서 묘사하는 ‘고시원에 사는 청년’과 ‘취업하고 1년 만에 퇴사해 부모 속을 썩이는 청년’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사회에서 말하는 ‘청년’이 아닌가? 나를 설명할 말을 찾기 위해, 자연스럽게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나와 비슷한 어려움들을 겪고,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삶을 지탱해 나가는 청년들을 여럿 알고 있다. 요즘 나의 고민은 기존 서사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다양한 청년들의 이야기, 특히 여성의 이야기를, 어떻게 양적으로 팽창시키는가, 어떻게 가시화시키는가, 사회에서 강요하는 서사에 대항해 어떻게 내면을 지킬 것인가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는 이와 관련한 고민을 펼쳐 놓는 자리가 될 것 같다. 나는 내일을 바라보지만 단지 오늘을 살고, 여성-청년으로서 마주하는 문제들을 오늘 일순간에 해결할 수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이는 좌절이나 무기력과는 다른 이야기다. 이는 오히려 나의 유한함을 아는 것, 그래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 열려 있는 내일의 불안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고, 그러고 나면 또 다른 오늘이 올 것이고, 그때의 나는 어제의 나에 기댄 채 다시 오늘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본 원고는 2017년 8월 24일,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