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형 Nov 25. 2022

어른은 참을 수 있다

아직도 노키즈존이…?

이 글을 쓸 때, 2022년 정도엔 노키즈존이 사라졌을 줄 알았다.


-

학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몇 년간은 어린이들에게 그림 가르치는 일을 했었다. 자식은커녕 조카도 없는 내가 유일하게 어린이와 대화하며 만나는 일이기도 했다.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어린이들 특유의 혀 짧은 발음을 알아듣기도 어려워서 몇 번이나 되물어야 했는데, 어느새 익숙해져서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을 수도 있게 됐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다 제각기 개성 있고 생각이 번쩍거리는데, 나는 왜 버릇처럼 ‘애들은 빤해. 애들은 단순해.’라고 생각했을까? 왜 내가 ‘어린이’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지? 이상했다. 성인이 된 뒤로 어린이를 겪으며 산 적도 별로 없는데, 은연 중에 나는 어린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어린이의 속성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다 자랐고, 이미 저 시간을 지나왔고, 아이들 하는 생각은 빤하다고, 애들은 맘에 안 들면 떼를 쓰는 존재고, 시끄럽고, 고집불통이고, 맛있는 걸 주면 잘 달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겨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어린이’라는 개념은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었음을, 진짜 어린이들을 만나면서 알았다. 내가 아는 어린이의 속성은 단편적이었고, 어린이들은 떠들기도 하지만 조용할 줄도 알고, 뛸 줄도 알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줄도 아는, 나와 다르지만, 또 그렇게 다르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분명 어린이의 시간을 거쳐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렇다고 어린이를 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런데도 어른은 어린이가 가끔 시끄럽고, 뛰어다니고, 떼를 쓰며 구른다는 걸 안다는 이유로, 그게 그의 전부인 양 여기며 어린이를 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른이니까 어린이의 저런 것쯤은 다 알지, 이제는 어린이가 아니야, 어린이랑은 달라.’ 하고 여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금요일 밤에 번화가에 나가 보라. 어른들도 뛰어다니고, 가끔은 취해서 굴러다니며, 괴성을 지르고, 더 놀자고 떼를 쓴다. 어른들도 실없는 소리를 하고, 의미 없는 소리를 나열한 노래를 부르고, 신이 나면 뛰고, 어린이가 뽀로로 보듯 연예인을 좋아하고,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 좋아진다. 어린이가 포켓몬처럼 진화해서 어른이 되지 않듯, 어린이와 어른은 서로 그렇게 단절된 존재도 아니다.


그런데 최근 늘고 있다는 ‘노 키즈 존’을 보면서 사회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이만 어린이로 용인해 왔다는 것과 그렇지 않은 어린이는 오직 덜 자란 이로만 취급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공공질서를 말하면서 ‘노 술 취하고 무례한 어른 존’은 설치하지 않고 오직 ‘노 키즈 존’을 걸고 넘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난 어린이가 아니고, 어린이에게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어린이에 “우리 집에 있는 큰 아기(주로 성인 남성을 표현하는)”는 포함되지 않는다. 어린이는 항의할 힘이 없으니까, 시끄러운 어린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다 눈살을 찌푸리니까, 개념 없는 젊은 엄마 이야기를 하면 듣지 않고도 사람들이 다 혀를 차니까, 누구를 위한 질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위해 어린이 출입을 금지하는 건 당연하고 손쉬운 방법이 된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술 취해 우는 사람에게 그만 울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시끄러워도 무슨 슬픈 사연이 있나 보다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어린이의 울음은 참아 주지 못한다. 어른이 우는 것보단 어린이가 우는 게 자연스러운데도 말이다. 처음엔 어린이에게 인상을 쓰다가, 그 다음으로 만만한 ‘엄마’에게 애 데리고 나와 폐 끼치지 말라며 생떼를 부린다. 마치 세상은 어른들의 잔치고, 어린이와 여성인 엄마는 초대장 없는 손님인 것처럼 굴면서 말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노 키즈 존이 아니라, 더 많은 어린이와 만날 시간과 공간이다. 어린이의 부정적 속성에만 집중하지 않고, 어린이가 어른과 단절되거나 이질적 존재가 아님을 받아들이고, 어린이라는 동료 시민에 대해 생각하고 익숙해질 기회가 훨씬 많이 필요하다. 인간은 원래 서로 의존하며 살게 되어 있고, 현재의 어른도 과거 누군가의 인내와 배려 속에서 자랐다. 어른이 어린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더 오래 산 만큼 배려와 인내를 익혔다는 점일 테고, 그 배려와 인내는 시민이 시민에게 당연히 나눠야 할 덕목일 테다. 때로 세상엔 더 많이 알아서 감수해야 하는 불편이 있고, 어른이 된다는 건 그걸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너무 자주 그걸 잊어 버리지만 말이다.


*본 원고는 2017년 10월 27일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에 게재되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은 여기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