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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형 Nov 28. 2022

마음의 읽을거리

난 어릴 때부터 읽는 것을 좋아했다. 배움이 느려서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한글을 완전히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는 줄곧 그랬다.


특별히 이야기를 좋아하거나, 책 읽기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왠지 그냥 글자를 읽는 것이 좋았고, 지금도 뭐든 사면 설명서부터 읽어 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특히 치약이나 샴푸 뒤에 있는, 읽어도 뭔지 알 수 없는 성분표를 천천히 읽어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성분표는 어찌 보면 아무 의미 없는 낱말들의 나열이지만, 읽고 나서 ‘음, 그렇군’ 하는 것으로도 무언가 끝마친 기분이 들고는 한다.


이번 학기에는 대학원에서 ‘영신수련’이라는 과목을 듣게 되었다. 지난 수업 때 영신수련 첫 주간엔 영적독서를 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우리 안에 읽을거리가 참 많아요.”


듣고는 조금 놀랐다. 이것저것 읽기 좋아하는 나지만, 마음 안의 읽을거리에 대해선 생각 못했는데. 아직 많이 안 배워서 잘 모르지만, 아마 영신수련 첫 주간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일 테고, 그 시간엔 내 안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게 아니라 말이다.


교수님의 말을 들으면서 내 안의 읽을거리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데, 뿌옇고 형체 없는 실뭉치 같은 것이 떠올랐다. 정리되지 않은 책상 풍경 같은 것이.


사실 하루를 돌아보면 읽는 것이 참 많다. 친구들과 나누는 메시지, 이메일, 신문 기사, 책, 텔레비전 자막들.....


하지만 그 내용들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순간은 무언가 내 마음을 읽을 때다. 내가 글을 읽고 있는데, 동시에 그 글이 내 마음을 읽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밑줄을 긋는다. 내 안에 있었지만 말로 정확히 할 수 없던 모호함을 누군가 적확하게 설명해 둔 걸 발견할 때만큼 읽음이 기쁜 순간은 없다. 아마 교수님의 저 말이 텍스트로 있었다면, 나는 밑줄을 그었을 것이다. 요즘만큼 내 마음이 읽기 어렵다 느낀 때가 없었으니 말이다.


일상에서 마음속은 종종 흔들어 놓은 찻잔 같다. 차 부스러기들이 어지러이 떠다녀서 마실 수 없고, 가만히 있어야 좀 마실 만해진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 가만히 있는 시간일 텐데,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시간이 없는 청년이 어디 나뿐일까. 모두 부산하게 마음의 실뭉치를 굴리며, 감히 그것을 꺼내서 풀어 볼 틈도 없이 또 하루를 보낼 것이다. 그런 하루가 반복되다 보면 결국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


이제 막 영신수련 수업을 듣기 시작한 나에게 어려웠던 것은 기도 후의 생각이 아니라 느낌을 말하는 부분이었다. 생각과 느낌은 다른데도 떼어 놓기가 참 어렵다. 뭔가 보고 감상평을 쓴다고 해도, 보고 난 후의 생각에 대해 말하지, 심상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게 된다. 느낌의 언어는 종종 감정적인 것, 그래서 연약한 것, 공적으로 발화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소서는 경험의 성과를 기술하라고 요구하지, 그 안에서 우리가 느낀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느낌의 언어를 많이 잊은 것이 아닐까. 우리의 마음은 옳고 그름의 언어만으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는데, 우리가 답해야 하는 질문들은 ‘객관적’인 것만 내놓으라고 하니 말이다.


마음 안에 있는 읽을거리들이 항상 명쾌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마리아를 자주 떠올리는데, 결국 우리 마음의 일도 이렇게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닐까. 때론 글이 내 마음을 읽기 전에 내가 마음을 먼저 읽으면 느낌의 말을 좀 더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리고 내 안의 읽을거리를 먼저 찾는 것이 나를 돌보고 책임지는 방법이라는 생각도.


*본 원고는 2017년 9월 28일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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