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똥

by 맨발이
11.jpg 은행 똥 - 이유진


결실은 일의 결과가 잘 맺어지는 것이다. 과정을 통해 시간의 맺음을 지켜보는 것. 그 맺음의 끝이 무엇이기에, 열매는 어떤 것이기에 앞으로 향하게 하는 것일까. 열매를 만드는 과정에 무엇을 담고, 담을 수 있는 크기는 정해진 것인지, 조절 가능 한 것인지 헷갈린다.


여름부터 푸르스름한 열매를 방울방울 맺은 은행나무를 보았다. 가을이 되면 짠하고 한 번에 달린 것처럼 쿨 한 척한다. 포동포동하게 살이 차오른 은행이 언제 떨어지나 지켜보아 왔지만 나는 처음 본 것처럼 신기하게 알은체 했다. 떨어진 노란 은행은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똥냄새가 난다. 은행나무가 똥을 쌌다. 누군가의 결실을 보고 똥을 쌌다며 가볍게 말해도 되는 걸까. 흔들림과 반복됨으로 정해진 자리가 있다면 자리를 찾아가고 없다면 만들어 가는 것이 그림의 결과라 여겼다. 은행나무는 가을 폭탄이 되어 자리를 찾아간다.


은행을 냄새가 난다고 감히 똥이라 불렀지만 잘 씻어서 말리고 씨앗만 남기는 순서를 거쳐보자. 딱딱한 껍질을 깨면 나오는 보드라운 씨앗은 익히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된다. 은행 똥 같다고 모른 체 했다면 만날 수 없는 세계이다. 값진 알맹이를 얻으려면 수고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몇 년 전 다음에서 브런치라는 글쓰기 플랫폼을 만들었다. 홍보를 위해서 책을 출간해주는 공모를 했다. 나는 서툰 그림일기를 그려서 올렸고 혼자 기대하고 있었다. 처음 안 됐을 때는 자질 부족이라 여겼고 또 안 됐을 때는 나랑 맞는 출판사가 없었던 거라 위로를 했다. 그 다음부터는 출간해주는 이벤트와 무관하게 그냥 하자 싶었다. 누군가는 보고 있겠지 생각을 했고, 내가 나에게 일을 의뢰한 거라고 주문을 외었다. 시간이 지나서 쌓인 그림일기를 보았을 때 분명하게 부족함이 보였다. 얻은 거라면 전보다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눈 정도라 여겼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 명은 보겠지 했는데 그 한 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잡지사의 기자 분이었는데 나의 여물지 않은 초록 알갱이를 알아보셨다.


그림책 작가 세르주 블로크의 말을 옮기고 싶다. “전 창의성이 그저 무언가를 할 용기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에게 무언가 해보는 것을 허락하는 마음. ‘왜 안 되겠어’하는 생각, ‘실패해도 괜찮아. 별거 아냐’라고 말해주는 자세.”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에 실린 말이 떠올랐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까, 끝까지 할 수 있을까, 발전은 하고 있는 거 맞나 이런 고민들이 나를 주저하게 만든다. 그림으로 표현하고 보여주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어떨 때는 숨기고 싶다. 좀 더 완벽한 아니 완벽은 바라지도 않고 나은 모습으로 표현하고 싶다. 소심함을 품고 있는 푸릇한 열매는 때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용기는 안 나지만 똥 쫌 싸면 어때?! 그런 마음가짐 이고 싶다. 먼 훗날에는 노랗게 익어서 바닥에 떨어져 밟히고 신나게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저 제자리로 돌아간들 어쩌겠는가. 자리를 찾아가고 만들어 가는 은행 똥을 가볍게 보지 않기로 했다. 발뒤꿈치를 들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용기를 줍자. 가을 폭탄처럼 팡 터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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