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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육헌 Jan 28. 2016

여전히 공고한 그들만의 리그

영화 <빅 쇼트> GV 시사회에 다녀와서 쓰다


1.


영화 <변호인>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평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정치 이슈 또는 정치인과 관련된 영화와 그 리뷰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문화 권력'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 이동진 평론가의 영화평이었기에 여기저기서 달려들었던 듯 싶다. 이동진 평론가는 결국 해당 코멘트에 대해 새로이 블로그 포스트를 작성하여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 글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구절을 인용해본다.


딱 하나, 제가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에 대해 제가 제 견해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건 문제가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인으로서 지난 7년간을 살아오면서 적어도 영화에 대해서는 제가 뭔가를 회피하려 하거나 판단을 유보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제가 쓰는 글의 스타일 자체가 공격적이지 않을 뿐입니다.)

물론 평하기에 좀 부담스러운 영화들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영화를 일부러 보지 않은 적도 없고 본 영화에 대해서 일부러 평하지 않고 묵살한 적도 없습니다. 아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이라고 해서 우회하거나 위장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느낀대로만 써왔습니다.

영화평론가로서 제가 가진 직업윤리는 그것입니다.

2.


앞에서 다소 길게 직업윤리에 대해 이야기한 이유가 뭐냐고? <빅 쇼트>가 그리는 2000년대 중반 월스트리트의 풍경에서는 저러한 직업윤리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월스트리트의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기 바쁘고, 그 앞에 직업윤리는 무너진지가 오래다. '이 인간들, 시킨 일은 안 하고 돈 더 벌 궁리만 하네' 소리가 턱끝까지 차올랐다.


욕망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대부분의 가치는 금전으로 환산되는 게 이미 자연스러운 시대다. 돈을 벌 수 있기에 돈을 벌고, 자리를 지킬 방법이 있기에 자리를 지키고, 더 나은 자리를 얻을 수 있기에 얻으려 하는 이들. 욕망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그렇다고 마냥 비난할 수 있을까.


그래서 직업윤리를 충실하게 지켜낼때야 보상이 뒤따르는 시스템이었어야 했다. 욕망은 직업윤리에 의해 견제받아야 마땅했다. 그래서 필요한 건 구 시스템에 대한 강도 높은 개혁이었다. 욕망만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의 한계를 우리는 이미 잘 아니까. 월스트리트와 금융위기를 이야기할 때면 늘 따라붙는 '도덕적 해이'라는 단어도 결국 그들이 직업윤리를 지키지 않은 대신 스스로의 욕망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나, 결말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영화의 마지막에 설명되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미국 정부는 납세자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공적자금을 금융기관의 회생을 위해 투하했다. 그러한 와중에 금융위기의 주범인 금융기관의 CEO 들은 인센티브 잔치를 벌였다. 그렇게 여전히 오랜 시스템은 공고하다.


정치와 자본과 언론이 결탁하여 그들만의 리그를 공고하게 구축하는 우리네 현실 이야기. 누군가 그들만의 리그에 미세한 균열이나마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연대일 것이다. 정치에는 투표로, 자본에는 불매로 혹은 구매로, 언론에는 한 목소리로 연대해야 할 것이다. 시민을 직업이라고 친다면, 시민이 이행해야 할 직업윤리는 연대일지도 모르겠다.


3.


<머니볼> 이후의 브래드 피트는 정말 멋지게 늙고 있다는 느낌. 특유의 껄렁함이 남아있는 말투로 투덜거리는 모습이 참 좋다. 브래드 피트는 <빅 쇼트>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의 자본으로 할리우드 영화를 제작하면서 월스트리트를 비판하는 것은 아이러니한데, 이는 할리우드의 일종의 양심선언(?) 혹은 거리두기로 느껴진다는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김도훈 편집장님의 GV 코멘트.


브래드 피트는 '플랜 B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고 <빅 쇼트>의 출연과 제작을 겸했다.

4.


부끄럽게도 경영학과임에도 숫자놀음에 관심이 없어서 금융용어들은 어려울 뻔도 했다. 다행히 여러 카메오들이 중간중간 관객들에게 대단히 친절한 설명을 던져준다. CDO라는 금융상품을, 오래되고 잘 나가지 않는 생선을 한데 담아 스튜로 끓여 새 음식인양 내보내는 것에 비유하는 셰프를 비롯, 복잡한 금융상품과 용어를 적재적소에서 설명해주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실은 이러한 편집은 관객의 극 중 몰입을 깨뜨리는 기법 중 하나. 영화 시사 이후 이어진 GV에서 허핑턴포스트 김도훈 편집장님이 이 부분을 브레히트 효과와 함께 언급하기도 했다. 기억에 의존해 적어보자면, 이러한 편집은 원래 관객의 몰입을 깨뜨리는 기법이지만, 명배우들의 명연기가 앞뒤로 뒷받침되었기에 부드럽게 넘기는 것이 가능했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여기에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감독은 이러한 편집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조금 더 객관적으로 사고하게 하고, <빅 쇼트>를 단순히 실화 기반 영화가 아니라 실화 기반의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유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양한 카메오의 등장이 이어지는 가운데, 용어니 설명이니 생각이 안 나게 하는 마고 로비의 등장. '내가 5초 전에 무슨 설명을 했는지 기억이나 하니?'



(좌) 김동조 트레이더님 (우) 허핑턴포스트 김도훈 편집장님

5.


GV는 무척이나 즐거웠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김동조 트레이더님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렇다. 직접 돈을 투자하는 영화 속 인물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디엔가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는 것. 매입한 집에, 투신한 산업군과 직업에, 배우자에, 자녀들의 교육 방향에. 내가 어떤 포지션을 깔고 있고 어떤 포지션으로 갈 것인지, 내가 잡을 빅 쇼트는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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