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면에 '천애 고아'가 될 거라는 악담을 살면서 처음 들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우!"
택시에 채 오르기도 전에 우렁찬 인사말이 유진의 귓전을 때렸다. 택시 안에서는 영탁의 '찐이야'가 꽝꽝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새벽과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에너지에 유진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택시에 올라 반쯤 몸을 눕혔다.
"근데 뭐 하시다 손님은 이 시간에 택시를 타실까? 금요일이라 노신 건 아닌 것 같고......"
유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피곤이 몰려와 조용히 가고 싶었는데 느낌상 이 아저씨는 수다쟁이가 분명했다. 아저씨는 유진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는 불금을 보낸 모양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진은 맨 얼굴에 안경, 추레한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도시락 가방까지 들고 있었다. 유진은 '찐이야'가 요란하게 흐르는 택시 안에서 '일했어요!'라고 큰 소리로 외쳐야 했다.
"근데 무슨 일을 하시기에 이 야심한 새벽에 퇴근을 해요?"
"저는 디자인 쪽 일 해요."
무슨 일을 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기 싫을 때 쓰는 치트키를 썼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자리 잡은 지도 어언 8년, 쏟아지는 일에 피곤함보다는 뿌듯함을 느끼는 유진이었다. 한때는 밤새워 작업한 날에도 아무도 몰라주는 게 서러웠지만, 지금은 의뢰가 끊이지 않았다.
"요새 정부에서도 그렇고 화이트 컬러만 쳐줘요. 그쵸?"
스르륵 잠에 빠지려던 찰나, 낯선 단어에 눈이 번쩍 떠졌다.
"근데 손님. 그래도 힘내셔야 돼. 블루컬러의 시대도 올 거니까. 손님의 시대도 올 거예요."
블루컬러......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
"옛날에야 뭐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인정받았지. 요새는 블루 컬러들이 다 일궈내는 거 아니야. 다 기술 있고 이런 사람들이 성공하는 거지. 화이트 컬러들이 성공하는 거 봤어요? 그러니까 손님이 힘내셔야지. 늦게까지 일한 보람이 있을 거예요. 언젠가는."
아저씨, 엄밀히 따지면 디자이너는 화이트 컬러인데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유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대에 따른 인식의 차이겠거니 했다. 유진은 다시 눈을 질끈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뭐, 여기가 평생직장은 아니니까."
택시가 출발한 곳은 소규모 회사들이 입주해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아저씨는 대기업에 다니지 못하는 유진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었다. 귓가에 울리는 가사처럼 찐, 진짜가 나타난 것 같았다.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고개를 드는 듯했다.
"결혼은 안 하세요?"
어른들에겐 직장 다음에 결혼이라는 어떤 공식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때부터는 유진도 잠을 포기하고 '도대체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마음으로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인 채 아직이라고 답했다.
"아직은 무슨 아직이야. 젊을 때 빨리 가야지. 그렇게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어. 나중에 진짜 힘들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큰일 났네. 형제나 자매는 있어?"
유진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는 유진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여동생이 있어요."
"여동생은 시집갔어?"
"아직이요."
유진은 시집을 '간다', 장가를 '간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가 누구네 집에 들어가는 일처럼 들려서. 결혼은 ‘가는’ 게 아니라, ‘하는’ 거 아닌가. 같이 살기로 ‘결정하는’ 거 아닌가. 아저씨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슬리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둘 다 큰일났네. 언제까지 둘이 서로를 챙길 줄 알아. 늙고 나서 남는 건 와이프고 남편뿐이야. 혼자 외롭게 늙어갈 거야? 내 나이때 되면 손님은 천애 고아가 될 거야. 아주 큰일이 나버렸어."
유진은 초면에 '천애 고아'가 될 거라는 악담을 살면서 처음 들었다. 황당해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비혼주의자인 유진은 어색한 웃음과 함께 그저 창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웃을 일이 아니야. 천애 고아가 되는데 왜 웃어. 동생이 돌봐 줄 것 같아? 그냥 고아야."
아저씨는 끝까지 고아가 될 거라며 쐐기를 박았다. 유진은 어이없어하며 어깨를 으쓱했다가, 손끝이 도시락 가방에 닿았다. 싸늘하게 식은 도시락통을 매만지면서, 괜히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혼자 일하고, 혼자 밥 먹고, 혼자 퇴근하는 밤. 혼자라는 건 가끔, 생각보다 무거운 일이기도 했다.
"나는 이 나이가 됐지만 자식들한테 손 안 벌려. 택시 운전도 하고 연금도 나와서 와이프랑 나랑 우리 두 가족 잘 먹고 잘 살아. 자식들이 용돈 보태 준다고 하는데 안 받아. 나는......"
신나게 떠들던 아저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틈 사이로 라디오에서 트로트 한 구절이 흘렀다. 아저씨는 창밖을 한번 흘깃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내가 번 돈으로 주말마다 장어도 사 먹고 라이브 카페 가서 노래도 부르고 그래. 좋겠죠? 저는 아주 즐겁게 살아요. 손님도 이렇게 살 수 있어요. 부부끼리 장어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얼마나 좋아."
아저씨는 이름 모를 트로트를 따라 부르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하지만 유진은 알 수 없었다. 아저씨는 정말 충만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을까. 혹시 자기 위로나 허세는 아닐까.
'전방 500미터 앞 목적지가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다다라감을 알렸다. 아저씨는 할 말이 아직 많이 남았는지 목소리가 다급해져 갔다.
"직장에 남직원은 없어요?"
"없어요. 없어."
"아우, 정말 큰일이야."
정말 유진의 인생에 큰일이 나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그는 큰 일이라는 단어를 연발했다. 아저씨의 바람과는 다르게 택시는 어느덧 집 앞에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유진은 황급히 택시의 문을 열고 내리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 순간, 그가 운전석에서 뒤를 돌아보며 유진 쪽으로 주먹을 힘차게 들어 보였다.
"그나저나, 손님 화이팅!"
뒤를 돌아본 아저씨 가슴께의 주머니에는 '김상식'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유진은 생각했다.
정말이지, 상식이 넘치는 택시였다.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었다. 도시락 가방은 그대로 싱크대 옆에 두었다. 설거지는 내일 할 것이다.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은 없으니까. 유진은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가 좋아하는 바디워시를 꺼냈다. 거품을 내어 천천히, 아주 오랜 시간 꼼꼼하게 몸을 씻었다. 샤워를 마친 뒤에는 아로마 오일을 켰다. 묵은 피로가 씻겨 나가는 듯했다. 얼마 전 큰 마음먹고 산 조명을 은은하게 밝혀두고,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조용했다. 아주 조용했다. 귀에 울리던 '찐이야'도, 아저씨 목소리도,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저씨는 몇 시쯤 집에 들어가려나. 그가 계속 장어도 먹고 라이브 카페도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유진만의 아늑한 침실이 눈에 들어왔다. 유진은, 역시 나도 나름 잘 살고 있는 거라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