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역할 자처하는 고양이

채리의 애정은 ......

by 이경화

채리의 애정은 오로지 행복이를 향한다.

어릴 때는 장난도 심하고 세상 두려운 거 없이 언니에게도 놀자고 덤비고, 놀아주지 않으면 몸을 날려 헤드락을 걸며 선제공격을 가하는 천방지축이었다. 특히 머리 좋고 관찰력이 뛰어나 모방을 통한 사고도 잘 쳤다. 그중 가장 골치 아팠던 것은 현관문을 여는 것이었다.

퇴근 후 현관문이 열린 집을 마주하는 일은 상당히 무서운 일이었다. 우선 언제부터 어떻게 열려있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집 안에 침입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알 수가 없다. CCTV 설치를 심각하게 고려하여 한동안 여러 군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두려움은 해리를 비롯한 고양이들의 상태였다.

다들 길에서 지내던 고양이들이 집고양이가 되었기에 혹시나 다시 자유롭게 다니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걱정스러웠다.

실제로는 매번 이렇게 대문이 활짝 열려있으면 오히려 겁을 먹고 현관문 근처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단, 해리는 제외였다.

해리의 옥상 산책이 집사가 없을 때의 외출이 되어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함께 하는 외출은 그나마 제지하거나 간식이나 놀이로 어르고 달래 포기시킬 방법이라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 열어둔 것인지 해리가 집 안에 얌전히 있었던 것인지, 언제까지 문이 열린 채로 평화가 계속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퇴근과 거의 동시에 뛰쳐나와 옥상으로 향하는 해리를 다시 붙잡아 돌아오는 상황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행방불명된 고양이는 의외로 채리였다. 해리를 비롯한 4마리의 고양이는 얌전히 습식 사료를 먹고 있었지만 잠깐 사이에 채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어 부추기며 장난을 치지만 겁이 많아 열어둔 채 멀찍이 떨어져 구경만 하는 성격인데. 혹시 예행연습을 해왔던 걸까? 온갖 망상과 죄책감에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우선은 온 집 안을 뒤져보았다. 이사를 앞둔 집처럼 엉망이 된 집안 꼴보다 이렇게 뒤져도 보이지도 않고 불러도 대답조차 없는 무반응에 오싹했다. 결국 채리를 찾으려 밖으로 뛰어나갔다. 지나다니는 행인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묻고, 가게에도 부탁하며 필사적이 되어 갔다. 4시간 정도를 돌며 샅샅이 훑었지만 찾지 못했다.

패닉 상태로 고양이 탐정에 의뢰를 고민하며 귀가했다. 고양이 탐정은 당장 올 수 없었고, 주위를 찬찬히 더 뒤져보라며 간단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고양이 찾는 팁을 배워 다시 찾으러 나갔다. 그렇게 들락날락하며 자정도 넘은 시간 돌아왔을 때 발견했다. 현관문을 연 순간 거실 한 복판에서 열심히 습식 사료를 먹고 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채리였다. 애초에 그 녀석은 집 안에 있었던 거다.

그날 이후 출입문의 건전지 중 한 개를 빼고, 수동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바꾸어 사용했다.

나중에 또 비슷한 상황이 발생해 혼비백산하다 알게 된 사실은 어이가 없었다. 채리의 실종은 사실 집 안 싱크대 빈 서랍 때문이었다. 녀석은 출입문을 활짝 열어두고 자신은 빈 서랍을 수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장난의 스케일이 큰 채리는 대체로 얌전하고 까칠한 성격으로 체형은 날씬하고 울음소리는 가늘고 높다. 얼핏 예민 내향형 같지만 주위 상황에 민감하고 동생을 잘 챙기는 너그러운 성격을 가졌다. 특히 행복이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채리의 행동은 첫날부터 남달랐다. 돌이켜보면 그때 채리 또한 1년이 채 되지 않은 아기 고양이였다. 장난을 받아줄 리 없는 해리에게 장난을 걸었다가 도망 다니며 온 집을 날아다니던 채리.

무뚝뚝하다가 하악질을 퍼붓는 덩치만 큰 고양이와 지내는 일상은 세상 재미도 없고, 가끔은 우울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린 고양이의 출현은 반가웠던 걸까?

아기 고양이를 데리고 들어온 순간 주먹 정도밖에 되지 않는 행복이를 바라보며 유리문 앞을 괜히 어슬렁거렸다.

털을 곧추세우고 경계하던 행복이도 채리의 부드러운 관심에 금방 어미라도 만난 듯 문을 긁어대며 들어오려고 애썼다. 커다란 큰 언니 해리가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필사적이었던 행복이. 채리가 용감함을 최대한 끌어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채리가 어미가 되어줄 거라는 믿음이라도 있었을까? '설마 또 오버하네. 그건 인간인 집사의 지나친 낭만이지.' 스스로를 단속하면서도 기대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3주가 지나기 전에 합사를 결정했다. 해리는 데면데면한 모습으로 캣타워에 올라가 버렸지만 채리와 행복이는 마치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재연하는 듯 활기찼다. 낯선 고양이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행복이의 대범함은 어미 잃은 아기 고양이의 생존 본능일 수 있다고 이해했다. 채리의 다정함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둘은 구조 장소도 전혀 다르니 접점이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인데 왜 그렇게 친절했을까?

아무튼 채리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바로 엉덩이에서 냄새를 맡고, 털을 그루밍해 주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다. 이제 막 사료를 먹기 시작한 행복이가 식탐을 부리며 채리의 음식을 탐내도 그저 받아주고 내어주었다. 잠이 들었다가도 낑낑거리며 우는 모습을 본 이후부터는 소리를 내기도 전에 언제나 대기 상태로 옆에서 그루밍으로 다독이며 재워주던 모습은 모성애 가득한 어미 고양이, 그 자체였다.

행복이를 향한 채리의 관심과 애정은 현재진행형이다. 묘 춘기에 접어든 행복이가 흑화 한 채 지낸 대략 2~3년 정도를 제외하고. 그때도 채리의 의지라기보다 행복이의 거부가 심했기 때문에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행복이를 보면서 나는 조금 부럽기도, 가끔 채리에게 하악질 하며 귀찮아하는 녀석이 괘씸하기도 했다.

'호강에 겨워 오강에 똥 싼다.' 더니 딱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모친과 평범한 대화를 해 보거나 끈끈한 정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어서인지 절로 나를 투영하게 되나 보다.

집사의 입장에서 채리는 여러모로 고마운 녀석이지만 가끔은 그 속이 정말 평온한지 신경이 쓰여 말썽을 부리거나, 짓궂은 장난을 치는 모습이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집사가 미처 사료를 챙기지 못해 그릇이 비어있어도 물로 배를 채우고 조용히 쉬는 채리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지나친 참을성과 얌전한 모습은 집사에 대한 애정일지도 모르지만 집사의 마음은 편치 않아 졌다. 늘 이리저리 챙기기 바쁜 채리의 마음도 겉모습처럼 평온했으면 좋겠다.

부디 집사인 나도, 우리 집 고양이들도 앞으로 행복하고 평화로운 날들이 더 많은 생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실눈 뜬 채 잠든 채리 옆에서 사주 경계하는 행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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