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되어 본 적은 없지만

각 손가락의 통증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더라.

by 이경화

학교에서 데리고 온 채리는 생후 3개월 정도였다.

그때 해리는 외동 묘이자 산책 묘로서 오롯이 관심을 독차지하는 유유자적, 느긋한 성격을 가진 성격과 달리 입이 짧은 편식쟁이였다.

누가 뭐래도 나의 첫 고양이로서 과한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기에 겨우 분리 불안을 극복하고, 어리광을 특권처럼 휘두르며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채리가 들어오면서 독점적인 사랑은 나뉠 수밖에 없었고, 해리는 채리에게 무반응을 빙자한 무시하는 태도뿐이어서 난감한 시간이 지속되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눈치는 빤해서 경쟁 상대가 생기자 오히려 더욱 내게만 바짝 붙어 채리를 경계하는 해기가 못내 안쓰럽고, 낯선 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채리에게도 못 할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나름 친해지게 하려고 사냥놀이를 시도해 봤지만 둘 중 월등히 큰 덩치의 해리는 그 압도적인 체격을 이용해 채리를 사정없이 덮치기 일쑤였다. 놀이인지 폭행인지 구분할 수도 없고, 점점 사이가 나빠지는 듯해 함께하는 놀이는 중지하고 말았다. 해리의 모습이 동생이 생긴 첫 아이의 처절한 생존 본능처럼 보였다. 안쓰러움에 늘 해리에게 더 상냥하게 말을 걸고, 한 번이라도 더 쓰다듬어 주며 챙겨주는 티를 내기 위해 신경을 많이 쏟았었다. 선점한 첫째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음을 각인시키려 애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부모에게 첫 아이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던 사람들의 말이 생각났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 첫째를 향한 부모의 관심만큼 첫째들의 책임감도 형제들과는 다르다고들 한다.

나의 경우 어린 시절 형제들과 나를 대하는 모친의 애정은 온도 차가 상당히 컸는데 그에 비례한 마음의 상처도 자랄수록 커져만 갔다. 그랬기에 나를 그들에게 투영시켜 다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당연히 지속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애초에 고양이와 인간의 사회는 같을 수 없고, 나도 평범한 인간이면서 평등이란 일방적 욕심으로 억지를 부린 거였다.

처음에 다툼은 일방적인 해리의 군기와 텃세로 느껴졌다. 그래서 해리에게 야단을 치고 기를 죽이기 일쑤였다. 둘도 많다며 더 늘릴 생각은 아예 없었지만 갈수록 고양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집 앞에서 죽어가던 녀석을 외면할 수도 없었고, 알레르기로 인해 구조했지만 어쩔 수 없다며 내게 부탁하는 지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의 실수 이후 해리가 기죽어 지내는 모습이 싫어 정보를 찾으며 공부하기도 했다.

새로 고양이를 들이게 되면 항상 기존의 고양이를 먼저 챙겨주고, 되도록 격렬한 다툼이 아니면 말리지 말고 지켜보라는 조언을 그대로 따른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해리는 기고만장한 모습이었다. 골치가 아팠지만 일단 간섭은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한 결과 겨우 살려낸 어린 수컷 고양이-지인이 입양해 간 노르웨이 숲 믹스 고양이-를 잡아먹을 듯 공격하다가 퇴근한 내게 걸렸다. 순간 짜증이 솟구쳐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해리에게 퍼부었던 기억이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해리가 그렇게 흥분했을까를 먼저 생각해 보는 이성 따위는 없었다.

그저 피곤한 상태로 돌아온 집에서도 편히 쉴 수 없음에 짜증이 폭발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해리가 도대체 왜 얼마나 화가 났으면 사람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을까? 보다는 계속 받아줘서 간이 커져서 그런 것 아닐까?라는 의심이 커지고 있었던 상황이라 아마 혼나지 않는다는 자신감에 그랬을 거라는 짐작을 사실이라고 확신하게 된 그 상황 자체도 폭발의 이유 중 하나였다.

일방적인 편듦이 있기 전에는 새로 온 고양이에게 조심히 다가가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그루밍을 시도하기도 하던 해리가 어떤 상황에도 자신이 혼나지 않음을 알고는 점점 산책 후 들어가자고 하거나 간식을 욕심낼 때 더 주지 않는 경우 내게도 하악질을 하기 시작했기에 혼란스러워 고민하던 중 맞닥뜨린 상황이라 더 화가 났다.

눈치를 살피며 내 근처에서 배회하던 녀석을 외면하자 결국은 거실이나 방 안에 함께 있는 시간 점차 줄더니 구석진 곳에서 혼자 틀어박혀 벽을 향해 앉아 있거나 줄곧 잠을 자거나 하는 시간이 많아져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동물과 기싸움하는 것도 어이가 없고, 사람이 아닌데 반성하고 있는지, 억울해하는지 알 수도 없는데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어 해리를 달래어 기분을 풀어주려 애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서로에게 익숙해지던 어느 날 채리의 중성화 수술이 잡혔다. 퇴원 후 다시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 채리를 재차 밀어내고 하악질을 하는 해리로 인해 모든 것이 다시 초기화되며, 조금씩 긴장감도 높아졌다. 그러는 동안 둘은 끝내 친해지지 못했다.

지금도 둘의 관계는 장난이 곧 싸움이 되어버리거나 해리가 채리를 피하는 모습이다. 고양이들끼리의 친근함도 첫 만남에서 집사의 중재가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둘의 모습을 보며 실감한다.

고양이들에 대한 내 애정에도 분명한 온도 차가 있다.

해리에 대한 마음이 상대적으로 각별함을 스스로 인정하자 부모의 마음을 추측해 보게 되었다.

여자로, 엄마로 살지 못하고 평생 형제 많은 집 가장의 몫을 하며 살았던 모친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부모 연습도 가장이 될 거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모친. 그녀는 어쩌면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느라 세심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역할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가장의 무게를 우선시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고양이들끼리의 관계 개선보다 사료와 따로 하는 사냥놀이에 비중을 두고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고양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다 갈 수 있기를 바란다. 굳이 더 바란다면 끝까지 함께 하며 각자의 개성대로 지낼 수 있도록 지켜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고양이들에 대한 애정과 별도로 해리에 대한 사랑과 지지가 더 큰 나를 인정하게 되면서 그녀도 자신의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으리라 추측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된 후 모친의 태도를 이해하기 쉬워졌다. 상처는 흔적을 남긴다. 나의 상처도 흔적은 그대로 남았지만 풀 곳 없던 분노는 가라앉아 간다. 그저 지금에 감사하며 살아가자고 오늘도 스스로 나를 다독인다.

누리를 사냥하려 기다리는 노아와 방관하며 구경하는 행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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