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기 싫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저 곧 결혼해요.'
평일 점심에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고 숟가락질을 멈췄다. 애매하게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단톡방(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누군가가 곧 결혼한단다. 너도나도 '축하한다', '청첩장은 언제 나오냐', '한 번 봐야겠다' 등 응원의 카톡을 보내는데 축하의 말보다 불쑥 다른 생각이 먼저 삐져나온다.
'축의금 내야 하나?'
가을 웨딩 시즌이 한창이다. 결혼과 먼 나이는 아니지만, 결혼을 준비하는 입장은 아니라서 웨딩 시즌이 주는 의미가 크지는 않다. 그러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받는 청첩장은 많다. 체감상 진짜 친한 친구들보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서먹했던 친구, 친구라기보다는 일면식 있는 지인, 회사에서 별로 친하지 않은 동료들이 우후죽순으로 결혼하는 것 같다. 유유상종이라서 당신 친구들이 결혼을 안 하는 것 아니냐고 누군가 되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만, 요지는 정말 친분이 있는 사람들보다 친분이 없는 사람들의 경조 행사에 지출하는 비용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런 애매한 사람들이 청첩장을 전달하는 형태는 다양하다. 위의 단톡방 사례에서는 단톡방에 모바일 청첩장을 올리면 될 일이고, 좀 더 친근한 대화를 더하고 싶다면 카카오톡으로 '잘 지내지? 오랜만이야. 어떻게 지냈어.'로 구성된 간단한 일대일 대화로 10여 분간 시간을 때우다가 '사실은 나'로 시작하는 문장을 던진 뒤에 똑같이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면 될 일이다. 회사에서는 어정쩡한 사이에 직접 건네기 부담스러웠는지 말없이 내 빈자리에 청첩장을 두고 가는 경우도 왕왕 있다.
얼굴 안 보고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는 것이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청첩장을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식사 한 끼를 같이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청첩장 모임도 그다지 달가운 것은 아니다. 그동안 연락 한 번 없다가 청첩장을 주기 위해서 식사를 함께한다는 발상 자체가 축의금의, 축의금에 의한, 축의금을 위한 목적성 다분한 모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크림 빛깔의 빳빳한 청첩장이 신사임당이 그려진 종이 한 장으로 교환하기 위한 청구서로 전락하고 마는 순간들이다.
축의금 문화가 불편하다. 불편하다고 소리 내 말할 수는 없지만 못내 불편하다. 불편한 이유는 축의금이라는 단어에 떡하니 자리한 '돈' 때문이다. 돈 개념이 포함되는 순간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춤추는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의 논리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 개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순간은 상황에 등 떠밀려 주긴 줬지만(Give), 준 만큼 돌려받을(Take) 가능성이 희박할 때이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살면서 처음으로 친지가 아닌 생판 남의 결혼식에 갔던 적이 있는데 이때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에 나는 최저 임금만 받고 일하던 인턴이었는데 인턴십 한 달 차에 같은 부서에 있는 직원의 결혼식에 강제 동원되어 축의금을 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결혼한다고 가정하면 그 직원에게 줬던 축의금을 돌려받을 길이 없다. 연락처가 없음은 물론이고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데 설사 그중 하나를 기억해낸다고 하더라도 그 직원이 나한테서 받은 축의금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돈 문제는 언제나 예민하다. 가족 사이에서도 돈 계산은 철저히 하라고 조언하는 판에 어정쩡한 남한테 체면을 차리기 위해 쓰는 돈에는 마음이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축의금을 내기 꺼리는 이들을 '쪼잔하다'고 정의하며 손가락질한다. 정말로 쪼잔한 게 맞는 건지 논하기 위해 그런 이들에게 계산서 하나를 들이밀고 싶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해 우리나라 근로자의 평균 연봉이 약 3,634만 원이었다고 발표했다. 고소득자의 연봉이 함께 집계된 통계인 점을 고려하면 근로자의 대부분이 이 액수보다 훨씬 밑도는 연봉을 벌 것이다. 구인 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직장인 43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이 1년 동안 경조비에 지출한 금액이 약 140만 원이라고 한다. 평범한 직장인이 하루에 9시간씩, 주 5일을 근무한다고 가정하자. 1년 노동 시간은 총 2,160시간이니 경조비 140만 원은 약 83시간이라는 노동 시간으로 환산된다. 같은 조사의 결과에서는 직장인이 한 달에 약 1.6회, 즉 한 해에 약 19.2회의 경조사에 참석한다고 하니 결국 평범한 직장인은 경조비 1회당 약 4시간의 노동 시간을 지급하는 셈이다.
직장인이라면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의 4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를 알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역동적인 회사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 상사가 몇 번이나 고함치며 생트집을 잡고도 남을 시간이고, 거래처의 갑(甲)이 요청 사항을 손바닥 뒤집듯 몇 번이나 번복하고도 남을 시간이며, 협업하는 타 부서가 이전에 협의된 내용을 깡그리 무시하고 갑자기 헛소리를 몇 번이나 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이런 귀한 4시간을 흰 봉투에 곱게 넣어 청첩장을 건넨 타인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청첩장을 보낸 어색한 이들과 만나 4시간 동안 친분을 쌓은 적이 최근에 있던가 자문하면 1시간도 제대로 함께 보내본 기억이 없다. 막상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단 10분 만이라도 주어진다고 해도 그들과 나의 어색한 거리감 때문에 쭈뼛거리기만 할 것 같다.
축의금, 부의금과 같은 경조금 문화는 외국에서는 생소하며 오히려 무례한 문화다. 해외의 수많은 결혼업체들은 웨딩 기프트(Wedding Gift)를 권장하고 어쩔 수 없다면 설명이 담긴 축의금을 내라고 추천한다. 장례식장에서 부의금을 건네는 것은 실례가 되는 행위이다. 정성이 담긴 선물을 주거나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해 마음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개념인데 우리나라에는 오히려 그런 선물이나 직접적인 접촉이 부담스럽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린 것 같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선물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현금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라는 말 아닌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같이 불편한 심기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사회생활을 한 문장으로 풀어내자면 '싫은 것도 싫지 않은 척 가면을 쓰고 하는 생계 기반형 활동'이기 때문이다. 하릴없이 경조 문화에 영리하게 적응하는 경우도 많은데 내 주변에서는 아빠의 경조금 관리법이 가장 보편적이고 현명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지인의 결혼식장으로 떠나기 전에 골똘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아빠를 흘끗 본 적이 있다. 화면에는 엑셀 형태로 본인에게 경조금을 지급했던 사람의 이름, 액수, 경조 행사의 종류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Ctrl+F 키로 행사 당사자의 이름을 찾아서 그 사람이 이전에 본인의 경조 행사에는 얼마를 냈는지를 확인하고 딱 그만큼만 되돌려 준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받은 만큼만 줘서 0으로 만들겠다는 계산이다. 너무 계산적인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청첩장으로 5만 원권 한 장을 바꿔 먹는 우리네들 비즈니스 관계에서 채택할 만한 현명한 계산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리한 적응법에도 찝찝하고 껄끄러운 마음은 여전하다. 변용된 방식까지 이용해가면서 축의금을 주고받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화살을 결혼식 당사자에게로 돌리자니 그들은 '다들 으레 그렇게 하니까' 관례적으로 청첩장을 전달했을 것이다. 그동안 본인이 뿌리고 다녔던 돈을 회수하고 싶은 마음 절반, 억(億) 소리가 나는 결혼 비용에 대한 부담감 절반이 손뼉 치듯 마주해 청첩장 한 장이 인쇄됐을 것이다. 돈 내는 사람들도 순수함의 발로로 내는 것은 아니다. 네이버에 '축의금'을 검색하면 대부분의 게시물 제목이 '축의금 얼마나 내야 적당할까요?'이다. 한 마디로 '얼마나 내야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욕을 안 먹겠느냐.' 이 뜻이다.
'그래도 결혼식인데', '중요한 날인데', '앞으로 얼굴 볼 사이인데'라고 말하며 성스럽게 여겨지는 경조사에 은근슬쩍 경조금 문화를 고착시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게 입막음하는 모두의 시선이 왜곡된 문화를 더욱 공고히 한다. 1994년부터 2013년까지 4차례에 걸친 설문조사에서 축의금을 내는 성인의 약 70%가 매번 '결혼식 축의금이 가계에 부담된다'라고 답변해왔는데도 말이다.(한국갤럽, "결혼식에 대한 여론조사 - 1994/2001/2005/2013년 비교")
결혼을 축하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지인들의 길흉화복에 함께하며 그들이 좀 더 행복하기를 빌어주는 마음은 남들과 똑같다. 그런데 왜 소망의 방식이 꼭 돈이어야 하냐는 말이다. 왜 하필 내 진심이 내고 싶지 않은 돈으로 퇴색되어야 하느냔 말이다. 아무리 가장 유용한 선물이 돈이라고 해도 강요된 진심이 공허한 메아리만 낳는다는 것을 행사의 당사자도, 수많은 주변 지인들도, 그 어느 누구도 모르는 것인지 궁금하다.
스물네 살 때 처음으로 가본 남의 결혼식 이후로 친지나 정말 친한 사람들 아니면 결혼식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 돈 봉투만 식에 참석하는 지인을 통해 대신 전달하고는 한다. 아직도 몇 년 전에 느꼈던 뻥 뚫린 공허함을 잊을 수가 없어서다. 5월의 맑은 하늘이 천창으로 훤히 보이던 식장에서 탁 트인 버진 로드를 걸어가는 우리 회사 아무개 신부의 걸음걸이를 무표정으로 지켜봤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낯선 이와 다를 바 없는 그 신부를 바라보며 어른들의 당연한 세상에 이질감을 느꼈다. 식장 입구에 마련된 돈봉투 함에 흰색 봉투를 넣는 것으로도, 상아색 체어 커버를 덮어씌운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자리만 채우는 것으로도, 돈 낸 만큼 밥이나 먹자며 뷔페에 우르르 몰려가서 말라비틀어진 새우초밥을 먹는 것으로도 쥐어짜 낸 마음을 진심으로 위장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단순한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 식장에서 오직 나 하나인 듯했다.
내기 싫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당신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아직 경조금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 것 같아 이번 경조금은 내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거짓된 미소로 청첩장을 받아 들고 꺼림칙한 손길로 돈 봉투를 돌려주는 작위적인 허례허식이 없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아무리 사회생활이 거짓으로 얼룩진 길이라고 해도 최소한 누군가의 희로애락에서 Ctrl 키와 F 키를 눌러서 찾은 액수 대신 진심을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 대가로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는 경조사와 축의금을 보이콧해야 할지라도 비사교적인 방법으로 더 사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