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준 그늘에서 벗어나기까지, 두 번째 이야기.

세상에 주눅 든 아이, 정신분석을 만나다.

by 윤모닝










가족 안에서 주눅 든 아이,

바깥세상을 만나다.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고등학교 3학년.

모두의 반발을 무릅쓰고 의대를 목표로 과감하게 고등학교 자퇴를 했고 (이전 첫 번째 글 참고)

2년 동안 재수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며 새벽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공부에 매진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원하던 의대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의 진로를 다시 생각하면서 고민한 결과,

차선책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한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수능 공부처럼 힘들게 공부하지 않아도 되겠지라며 안심했지만

간호학과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공부량이 많았고

현장실습과 함께 각종 리포트와 시험공부도 해야 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러던 중 대학생활을 하면서 나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재수, 삼수 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나를 위로해 주는 그 어떠한 존재를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위로받는 것을 목적으로 친구의 손을 잡고 들어간 교회.

뜻밖에도 나는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방법과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부모가 알려준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세상은 안전하지 못하며, 부정적이고, 상처를 주는 것이라고, 힘들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라고 알려준 부모를 떠나

처음 알게 된 다른 세상은 나에게 따스하고, 위로가 되는,

때로는 아픈 과정을 거쳐 성장하도록 키워주는 온실 같은 곳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내 생일날 맞이한 교회 수련회 아침. 두 동생은 오며가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축하받을 수 있도록 벽에 생일축하 메세지를 붙여놨다.
내가 사랑했던 라파마을.




정말 인생에서 좋고 귀한, 흔치 않은 경험을 많이 하게 해 준 교회 공동체.

돈을 줘도 못할 귀한 경험들을 많이 했었고 그 경험들로 얻은 열매들은

나라는 한 사람의 성품을 만들어가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나를 인정해주지 않은 부모님을 향한, 그리고 세상을 향한 분노는

당시 다니던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누그러드는 듯했으나

내 안에 그대로 억압된 채 축적되고 있었고,

이는 고스란히 성적을 상위권 안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항상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존재로 있어야 한다는 비합리적인 신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겉으로는 모두와 잘 지내는 사람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속으로는 여전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주눅 든 아이로,

나는 그렇게 대학교를 졸업했다.



사실 10년이 지난 지금, 대학생 때를 돌아보면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나는 대학교 생활을 아~주 무난하게, 기억에 남는 것 없는 정말 평범한 대학교 생활을 했던 것 같다.













있는 존재감도 없다고 말하는

소극적인 간호사.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던 나의 신규간호사 시절.

원래 있었던 병동에서 호되게 혼나면서 일을 열심히 해나가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적응하지 못해 타 부서로 많이 옮겨 다녔다.

자존감이 바닥을 칠만큼 치던 중 만나게 된 또 다른 병동.


맨 처음 만났던 병동보다 훨씬 따뜻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의 병동이었다.

충분히 첫 병동에서 기가 죽은 채로 지냈던 내 어깨를 조금은 피고 다녀도 되었으나

교회와 다르게 차갑기만 한 이전 병동 분위기에 이미 호되게 당한 나는 세상이 무서워졌고

한껏 움츠린 채 사회생활을 이어갔다.

조금씩 나는 교회를 다니기 전의 내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2년차 시절 정말 힘들고 고민이 많았던 시기로 기억한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고 한 가지를 깊게 파고드는 것은 잘했으나

소위 일머리가 없었던 나.

작은 지적 하나에도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나.

실수 하나도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못하던 나.

항상 불안함을 가지고 걱정을 달고 살았던 나.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으나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의사소통하는 것이 서툴렀던 나.

이리저리 눈치 보며 아웃사이더로 지내던 나.

현재 내가 신규간호사 시절을 떠올리면 이런 모습들이 떠오른다.


남들이 있다고 말하는 존재감 조차도 없다고 부정했고,

칭찬 한마디, 좋은 마음들 조차도 왜곡하거나 부정해버렸다.


나와 함께 들어왔던 동기들이 12명이나 있었지만

삼수 생활로 현역들과 나이차이가 날뿐더러

이렇게 소극적이고 작은 바람에도 힘없이 흔들리는 나의 태도에

주변 동기들도 쉽게 다가오지 못했고 나 또한 편하게 다가가지 못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그저 노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신규간호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당시 부모를 향한 분노와 세상을 향한 분노는

고스란히 나를 향해 휘두르는 채찍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자퇴라는 큰 대가를 치르고 열심히 공부했으나 목표로 하던 의대에 가지 못한 것,

간호학과에서도 기대만큼 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하지 못한 것,

다른 동기들에 비해 일이 느린 것 등

열심히 버텨주고 있는 나 자신에게 조차도 이런 죄책감을 씌우며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나를 따뜻하게 받아주는 품을

나 스스로도 내어주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20대 후반의 간호사 생활까지

나는 깊은 바다 속 심연에 빠져있는 존재처럼 느껴졌고

저 멀리 빛은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나에겐 오지 않을 거 같은,


마치 나를 알아줄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조그마한 희망이 있을거라고 믿고 싶으나

이젠 그 끄나풀 조차 잡고 있을 힘이 없는 그런 상태였다.











나를 알아주는 세상,

정신분석을 만나다.



정신분석 상담을 진행하고 성장한 나는 다른 세상을 탐구하는, 비로소 진정한 모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3년차 간호사로 일하던 어느날.

가족 간의 큰 불화로 인해 실제로 나는 죽을 뻔 했다가

겨우 뛰쳐나온 경험을 하고 내 목에 손가락 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가족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앞으로 나랑 대화하려면 가족 심리상담사를 통해서 해요.

절대 나랑 1대 1로 대화할 생각하지마세요.

내가 여러번 말 해도 내 말 이해 못하고 이해할 생각도 없으니까

더이상 가족하고 직접 말하기 싫어요.”


간호학과를 다니면서 정신간호학 분야에서 가족 상담부분을 배웠기에

이런 대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만나게 한 심리상담사와 가족상담을 예약하고 상담 약속을 잡은 첫날,

나는 사정이 있어 늦게 도착하였고 나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 아빠, 오빠가 먼저 도착해서 셋이서 상담을 시작하기로 했다.

상담선생님은 내가 오지 않았지만 3명을 상담하는 동안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떠한 심정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고 한다.





똑똑똑.


빗속을 달려서 도착한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보이는 세 사람과 상담사.

나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상담사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상담선생님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기 소개 해줄 수 있어요?”



나는 가족들 앞에서 웃는 모습, 사회생활을 할 때 나오는 모습

그 어떤 모습들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을 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두근대는 내 심장박동을 느끼며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하고 바라고 있었다.


나의 마음을 이미 다 파악하신 상담선생님은 가족 3명을 밖으로 내보내고,

상담실에 나와 선생님 둘이 덩그러니 남겨두셨다.



문이 스르륵하고 닫히고 난뒤, 가족이 나간 것을 확인한 나는

푹 숙인 고개를 들고 어깨를 피며 자세를 다시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선생님이 물으신다.

“이제는 말해줄 수 있죠?”



나의 마음을 간파했다고 생각한 상담사에게 나는 신뢰감이 생겼고,

내가 오랫동안 저 깊은 심연의 바다에서 찾았던 한줄기 빛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그동안의 나의 이야기를 쭉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 어떤 것 하나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꺼내는 것이

저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이니까 전부 이야기 할게요. 선생님.”




그렇게 시작된 정신분석 상담.

나와 정신분석의 만남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정신분석을 이어오면서 보낸

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상담을 하면서 장독대 밑에 묵혀두었던 내면 아이들을 한명씩 만났다.

그 아이들을 만나며 감정을 해소하는 경험도 하고 그 과정에서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는지,

그동안 내 안에 억압되어있던 감정과 욕구들이 무엇인지 알게되었고


가족들에게서 받은 영향들, 스스로에게 지우고 있던 죄책감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 오랜 시간동안 묵혀뒀던

부모를 향한 분노, 세상을 향한 분노와 마주하게 되었다.







세상을 애쓰며 힘들게 살아갈 필요 없다고.

나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력이 느리고 고지식하다는 말 안에 가둘 수 없을 만큼

내 안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으며,


세상은 나를 위협하고 무시하는 것들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좋은 것들이 많은 세상임을 조금씩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았던 부모에 대한 분노와

세상을 향한 분노로 시작했던 건강하지 못했던 나의 모험은,


상담을 시작하고 내가 누군지 알고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세상을 탐구하고 싶어하는 진정한 모험으로 바뀌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이 순간도

가족이 준 그늘에서 정서적으로 온전한 독립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비록 아직도 남아있는 내 안의 깊은 감정들을 더 만나가야겠지만

처음의 내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면 너무 많이 성장해왔기에


지금까지 삶의 끈을 놓치 않고 버텨준 나에게

쉽지 않은 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지금도 걷고 있는 나 자신에게

오늘도 너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