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점선대로> 리뷰
지인은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조용한 성격의 지인에게는 의지가 되어주는 친구도 있고, 그녀를 인정해주는 교수님도 있다. 가끔, ‘자를 때는 칼로’ 잘라야 한다는 작은 강박이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녀는 평범에서 크게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 아, 그리고 그녀의 뇌의 일부는 AI이다. 그녀의 뇌 속 작은 비밀은 지극히 평범한 외모와 성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녀를 평범한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게 만든다. 그렇다면 사람이 아닌 지인은 AI일까, 지인은 혼란스럽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인식되고 싶지는 않다.
영화의 배경은 인간과 인간의 형상을 한 AI가 섞여 사는 사회이다. 함께 학교도 다니고, 직장도 다니지만 인간들은 AI를 은밀하게 혐오한다. ‘AI로부터 내 아이를 보호’하는 AI 비상차단기가 버젓이 팔리고, 같은 전공의 학생들은 인간이 아님에도 감성을 통해 영감을 받고, 작업을 인정받는 지인을 불신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없이 AI가 반 섞인 뇌를 갖게 된 지인의 탓은 아니지만 애초에 자신의 잘못에서 시작되는 혐오라는 것도 없다. 인간에 소속되고자 하는 지인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AI를 타자화하며 농담을 던지지만 이내 친구들이 자리를 비우자 적막이 감돈다. 혼자 남은 파티, 지인의 손에는 AI비상차단기가 들려있다.
누군가를 인간이라고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답게 행동하면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의 형상 안 마음(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뇌에 불과한)의 반이 인공지능이라면, 혹은 전부가 인공지능이라면 그래도 여전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선은 점의 연속이지만, 점이 연속한 선인 점선은 선과는 다른 취급을 받는다. 덜 연속되어 있으니까. 엄연히 다른 개체니까. 실선에 가까우나 여전히 점선의 취급을 받는 지인은 실선의 앞에서 보다 점선인 AI를 타자화하지만 이것이 그녀를 실선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존재에 대한 규명, 이름에 대한 고민, 차가운 혐오와 다정한 타자화가 고루 섞인 이 세계에서 정답은 없다. 보이는 것은 어딘가 비어있는 듯한 지인의 표정 뿐이다.
파티에서 혼자 남은 지인은 케이크에 불이 켜진 라이터를 꽂고 불어본다. 라이터는 꺼지지 않는다. 장미는 천천히 시들지만LED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변함없이 빛을 내다가 배터리가 다 되면 툭 꺼진다. 전원이 꺼진 AI가 길을 걷다 갑자기 쓰러지듯이. 지인은 전원이 꺼지면 불시에 쓰러지는 AI의 삶을 더 이상 살지 않기로 한다. 스스로의 끝을 선택한다면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우주에 흩뿌려져 각각의 점으로 존재하는 별들은 점선으로 보일 때 별자리로 불리지만 그것의 각각의 별의 존재를 규명하지는 않는다. 타인에게 규정되는 존재와 타자를 위해 필요한 나의 정의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사이에 존재한다. 그녀는 우주에 속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