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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Aug 12. 2020

오늘의 운세

내 인생에 요행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가끔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은 날이 있어.

같은 일을 하는데도 누군 운이 좋아서, 누군 알량한 처세술로 쉽게 얻는 기회들이 내게는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해도 겨우 올까 말까 한 기회가 될 때 말이야.


고등학생 때, 대학 면접시험을 보는데 내가 준비한 건 안 나오고 하필 준비 안 한 것만 줄줄 나온 적이 있었어. 열심히 안 한 것도 아닌데 생각이 안 나더라.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해보고 면접장을 나오면서 그 날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어. 근데 모든 면접을 다 데려다주고, 기다려주던 아빠가 그러더라. 노력을 덜 했나 보다, 운도 실력이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서럽던지. 반박할 말도 없어서 더 속상했었거든. 왜 지금 그 말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어.


이직하려고 이력서 넣은 회사에 면접이 있던 날이었어. 퇴근하고 가려고 면접을 잡았는데 부장이 외부 미팅 끝나고 붙잡더라. 밥이나 먹고 바로 퇴근하래. 병원 예약이 있다고 둘러대도 막무가내였어. 양꼬치에 칭다오보다는 하얼빈이라며 낮 세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끝날 기미가 안 보였어. 앉혀놓고 한다는 이야기가 출장비로 나오는 몇 백을 술값으로 쓴 이야기, 회사 여직원들을 상대로 이상형 월드컵을 했는데 누가 일등이었네 하는 이야기들이었어. 다섯 시에 보내준다더니 중간에 빠지지도 못 하고 꼼짝없이 앉아 들을 수밖에 없었지. 결국 면접을 취소하고 앉았는데 나보고 그러는 거야.


너는 내년에 진급 못 한다. 아직 연차가 안 돼. 그러니까 잘해.

근데 너, 글 쓴다며?


나보다 늦게 입사한 남자 사원이 나보다 연봉을 삼백이나 더 받는다는 걸 알았을 때 보다 더 어이없었어. 직무를 바꾸고 사원으로 시작한 게 벌써 내년이면 3년 차가 돼. 근데 나보다 삼백 더 받는 그 남자 사원에게는 뭘 맡기네 마네 하는 중에 연차가 안 돼서 진급이 안 된다니. 하필 오늘 같은 날, 면접도 못 보고 발목 붙잡혀서 듣는 게 겨우 이딴 개소리라니.

술자리는 여덟 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어.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헛웃음이 나더라.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 걸까. 왜 다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것만 같고, 다 안 된다고만 하는 건지. 왜 정직하게 가는 것도 힘들어서 이렇게나 둘러가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야.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어. 왜 싫다는 말을 못 했는지, 왜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했는지.

어려서, 경력이 적어서, 여자라서 온갖 이유로 불합리하고, 부당한 대우들이 참 많아. 그러다 그냥 나라서 그런 건가 싶기도 했어.


땅 밑 아니 맨틀 지나서 외핵, 내핵까지 파고들고 보니 이 상황이 웃기더라. 애쓰지 않기로 해놓고 뭘 또 애가 쓰여서 속상한지. 남들 걸음에 맞추지 않고 내 속도대로 살기로 해놓고 어느새 발맞추려 한 내가 웃겼어.

서른 살엔 뭐라도 되어있을 줄 알았던 내가 웃기고, 아무것도 아닌 내가 웃기고, 누군가는 그런 나를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그런데 누군가는 또 그런 나를 보고 잘하고 있대.

그래. 오늘은 정말 운이 나빴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억울해하고, 한탄하다 눈물 몇 방울 (정말 몇 방울임) 흘렸더니 개운해지더라. 어차피 나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겪은 수모와 감정을 휘갈겨 SNS에 써두었더니 한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어.


계속하면 찾아온다. 그때가 운이 좋은 날인 거다.

운이 좋지 않은 날은 없는 거야.

파이팅. 아영.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심한 말 중에 제일은 “계속 그렇게 사세요.”라고 생각해.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에 절반을 훌쩍 넘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목표가 ‘회사에 붙어있기’는 아니듯이, 회사만 바라보며 살고 싶지 않거든. (이 달의 카드값은 책임져도 남은 인생까지 책임져주지는 않으니까)

회사가 전부인 양 살아온 그는 그대로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고, 나는 나대로 가던 길을 계속 갈 거야. 그러다 보면 친구 말대로 운 좋은 날도 오는 거겠지.

아빠가 말했던 ‘운도 실력이다.’ 있잖아. 내가 이렇게 정정해볼까 해. ‘네 운을 믿는 것도 실력이다.’라고. 그저 운이 나쁜 날로 기억되기에는 좋은 일이 훨씬 많았거든.

그러니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뱉는 말에 상처 받지 말자. 싫은  싫다고 말하자. 나를 믿고, 믿어주는 사람들을 믿고 가보는 거야. 정정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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