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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 Jan 07. 2019

각자의 결

비교하지 않는 삶

주말이면 홍대의 한 서점을 찾는다. 날씨나 주머니 사정에 구애받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에는 서점만 한 곳도 없다. 이번 주말에도 평소처럼 그곳을 찾았다. 마침 좋아하던 작가의 에세이가 눈에 띄었다. 개정판이 나오며 표지가 새로이 바뀌어 있었다. 이참에 읽어 봐야겠다 싶어 한 권을 집어 들고 서점 내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목차부터 빠르게 훑는데, 한눈에 보아도 읽고 싶어지는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무심한 듯 담백하면서도 그 끝이 간결한 문체가 늘 그렇듯 매력적이었다. 갑자기 기분이 확 상했다. 나는 왜 이런 구성을 생각지 못할까. 왜 이런 좋은 글을 쓰지 못할까. 비교가 고개를 들었다. 역시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달라, 괜한 짜증이 나 책장을 덮었다.



불행의 비결


불행에도 비결이 있다면, 단연코 그 첫 번째가 ‘비교’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와 나를 비교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리석음을 넘어 오만에 가깝다. 이제 막 글쓰기 시작한 내가 십 수년 내공의 글을 시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를 시샘하기보다 존경해야 마땅하다. 잘 쓰인 그의 책을 읽으며 나의 몫을 찾는다면 그저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는 것, 그의 시간만큼이나 오랜 시간 묵묵히 글과 함께 하는 것, 그 뿐임을 나 또한 잘 안다. 하지만 비교 앞에 합리적 판단이란 오직 머리의 몫일 뿐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비교는 우리를 눈멀게 하고, 비합리적인 열등을 부추긴다. 비교는 우리가 가진 것에 덜 감사하게 하고, 못 가진 것에 더 좌절하게 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자존은 좀먹고, 그 자리는 불행이 채운다.


역설적이게도 한때 비교는 나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10대 때, 고등학교 3년을 같은 반 친구로 지낸 아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내 마음 속의 경쟁자는 그 아이, 한 명이었다. 그 아이는 얌전하고 침착한 성격에 수학과 과학을 잘 했다. 반면 나는 괄괄하고 즉흥적인 성격에 언어와 사회 과목을 잘했지만, 수학과 과학에는 도통 재능이 없었다. 그 아이를 누구보다 부러워했고, 질투했고, 그래서 이기고 싶었다. 겉으로 보기엔 친한 친구 사이로 보였겠지만, 사실 나는 그 아이를 보며 승리를 욕망했다. 그 덕에 고등학교 시절 나는 꽤 열심히 공부했다. 서로의 등수를 엎치락뒤치락 오가던, 그 경쟁 관계에 뜨거운 열정을 느꼈다. 다만, 공부를 하느라 늦게까지 깨어있던 어느 날들에는 종종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그 아이보다 낮은 수학 점수에, 미술 수행 평가에, 하다못해 동글동글 정갈한 그 아이의 글씨체에서까지도 열등감을 느꼈다.


그런 내가 비교에 관해 각성을 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우리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학교에서는 소위 ‘인서울’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을 위해 대입 논술 특강반을 열었다. 그 아이와 나는 이번에도 함께 그 수업을 들었다. 읽고 쓰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꼈기에 그 수업에서만큼은 누구와도 나를 비교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1분이 1시간 같았을 자습시간이 논술반에서 글을 쓸 때면 순간에 지나가곤 했다. 나는 글 쓰는 일에 몰입하느라 그 아이가 논술 시간을 꽤 괴로워 한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글 잘 쓰는 네가 논술로 서울 가고, 나만 혼자 이곳에 남을까봐 솔직히 불안해.”

그 아이가 내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서러운 자기 고백을 터놓기 전까지는.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마침 논술 전형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 아이는 걱정하던 대로 고향에 남아 인근 교대에 진학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승리했느냐고? 물론 아니다. 그 아이는 4년을 곧이 졸업하고 일찍이 교사가 되어 누구보다 행복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의 패배? 그것도 아니다. 취업이 어려워 전전긍긍하면서도 서울로의 상경을 후회한 적, 단 한 번도 없다. 우리는 그 누구도 승리하거나 패배하지 않았다. 각자의 삶을 각자의 몫으로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때 그 아이가 서럽게 고백해 준 덕에 깨달았다. 내가 완벽한 존재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아이 또한 나로 인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구나. 우리 두 사람 모두 타인이 가진 것, 그러나 결코 내 것은 아닌 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정작 우리가 가진 빛나는 점들은 보지 못했구나. 그날, 나 또한 그 아이에게 내가 느낀 열등감을 고백했다. 19살, 여린 감성의 두 소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지금도 ‘비교’가 나를 좀먹으려 할 때면, 그날을 떠올린다. 내가 가진 내 것을 보자. 가진 것에 더 감사하고, 못 가진 것에 덜 좌절하자. 그 순간이 내게 준 교훈이다.



나의 결을 찾아서


얼마 전, 블로그 이웃으로부터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일기 잘 읽었어요. 옅은 결이 좋다고, 파랑 같은 감상이라고 생각했어요.:)”

원채 칭찬에 약한 인간인 나는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타인의 말을 기준 삼는 것 역시 그리 주체적인 태도는 아니겠지만, 비교로 얼룩진 내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특히 저이의 칭찬이 좋았던 이유는 재능이 있다거나 글 솜씨가 있다는 식의 칭찬이 아니어서였다. 그저 당신의 옅은 결이 좋다고, 나의 결을 인정해 주었다. 배려를 담은 그의 감상이 나 또한 참 좋았다.


비단 저이의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도 ‘결’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특히 사람에 관해 말할 때 ‘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평가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둘 수 있어 좋다. 인격이라거나 성품이라는 말 안에는 타자의 평가가 담기기 마련이다. 반면, ‘결’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는 느낌이랄까. 이 글을 쓰는 참에 사전을 찾아본다. ‘나무, 돌, 살갗 따위에서 조직의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 ‘결’의 정의란다. 사람의 결 또한 그런 것 같다. 한 인간의 명과 암, 장과 단, 여린 상처와 굳은 딱지가 켜켜이 쌓여 하나의 무늬를 이룬다. 누군가의 결은 수려하여 한 눈에 띄는 멋이 있다면, 또 다른 누군가의 결은 은은하게 어디에서나 조화를 이룬다. 어느 하나 틀린 것 없고, 우열도 없다. 나의 결 또한 그럴 것이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의 결을 존중하겠다, 마음 먹는다. 남과 비교하느라 내 자신을 온당치 않은 방식으로 대하는 일, 이제 더는 그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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