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퇴사준비생의 런던
'퇴사'가 일종의 트렌드라고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서점에만 가도 퇴사의 전후과정을 담은 에세이들이
물밀듯이 출간되더군요. 그렇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퇴사준비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퇴사(예정)자' 와는
조금 다릅니다. 프롤로그의 내용을 빌리자면 이 책은 퇴사를 장려하는 책이 아닌 '퇴사 준비'를 권장하는
책 입니다. 고로, <퇴사준비생의 런던>에서 말하고 싶은 퇴사 준비는 바라는 이상과 현 위치의 간극을
인지하고 그 사이를 좁히기 위한 행위입니다. 두 발로 성큼, 건너띠기 위한 도움 닫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들은 런던에서 퇴사준비를 하고 왔습니다. 여기서 퇴사준비는 '미래 보기' 단계입니다.
저자들은 런던에서 다양한 '미래'를 보고 왔습니다.
흥미로운 것이 있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거나 엄청난 기술을들인 무언가가아닌, 과거의 것을
허물지 않고 재정의/재발견/재구성 했다는것에 있습니다. 총 18가지의 인사이트가 들어있는데,
많이 소개할수록 책을 읽었을 때 재미는 반감되니 딱 한 가지만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비롯해 각종 하스피탈리티 관련 분야를 전공하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꼭 배워봤을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서비스의 특징인데요, 그중 하나는 '소멸성'입니다. 오늘 팔지 못한 비행기 좌석이나 객실은 재고로
남지 않으니 내일 팔아서 이윤을 낼 수 없다는 게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죠 (주입식 교육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Bob Bob Richard의 창업자인 레오니드 슈토브는 운영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호텔, 항공 등 다른 산업에
눈을 돌렸습니다. 여행산업에서의 흥미로운 가격체계는 곧 Bob Bob Richard만의 비즈니스 문제를 해결해 줄 단서가 됩니다. 상대적으로 수요가 낮은 요일과 시간대에는 15%~25%의 가격 할인을 제공합니다. 여기까지는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할인 체계인데, 그 어디에도 가격 할인을 홍보하지 않는 데에서 Bob Bob Richard의 차별성이 드러납니다. "런치 특가 25,000 → 19,900!" 같은 카피를 적지 않는 이유는 Bob Bob Richard가 '고급 레스토랑' 이기 때문입니다. Bob Bob Richard를 방문하는 고객들은 대부분 중요한 미팅, 약속을 위해 방문합니다. 초대의 주최자가 계산을 하는데 구태여 여기저기 가격 할인 문구가 눈에 띄게 되어 의도치 않게 '가격을 할인하는 곳에 데려왔다'라는 느낌을 주어 머쓱한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약자만 홈페이지를 통해 가격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인데, 중요한 약속일 때에는 늘 찾던 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십분 활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Bob Bob Richard의 충성 고객들은 체면을 살리면서도 합리적인 가격체계를 이용할 수 있고, 가격이 싸다고 해서 음식의 양과 질이 떨어지지 않으니 계속해서 '숨은 가격' 프로모션을 활용할 것입니다.
Bob Bob Richard에서 찾을 수 있는 또다른 인사이트는 주문을 유도하는 샴페인 버튼입니다.
요리는 할인해주고 주류는 제값을 받는 가격 체계상 주류를 많이 판매해야 한 테이블당 마진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술은 따로 안 하시나요?'와 같은질문은 자칫하면 독특한 가격체계로 쌓아온 Bob Bob Richard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서비스 멘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권유는 모든 테이블에 눈에 띄게 설치한 샴페인 주문 버튼으로 갈음합니다. 버튼이 '주류'나 '와인' 이 아닌 '샴페인'이라는 점도 매력적입니다. 여타 스파클링 와인 중에서도 축하주로 마시기 좋은 샴페인을 콕 집어서 적어둔 것입니다. 보통 기념일이나 축하를 위해 방문한 Bob Bob Richard의 방문객들은 직접적으로 주문 압박을 받지 않으면서도 이 레스토랑에서는 언제든 샴페인을 주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식사 내내 노출됩니다.
NX-Board - 한화 Ch.H Plus
Bob Bob Richard의 마지막 매력 포인트는 '선택을 이끄는 메뉴판'입니다. Bob Bob Richard는 가격 할인 체계는 숨여두었지만, 추천 메뉴는 확실하게 하이라이트를 해둡니다. 추천 메뉴는 가장 비싸기도 한데요, 이는 고객의 행동을 유도하는 역할도 합니다. 학부생 시절 적절한 메뉴판이란 어떤 것인지 공부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최저가와 최고가의 차이가 2.5배를 넘으면 안 되고, 가격 순으로 오름/내림차순으로 정렬하는 것은 안 좋고 등등.. Bob Bob Richard의 메뉴판 속 특이점은 <헤르만 지몬의 프라이싱> 속 '누구도 사지 않는 효자상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00달러 정도의 예산으로 캐리어를 사러 온 고객에게 우리는 다양한 캐리어를 취급한다는 것을 알리는 척하며 900달러짜리 캐리어를 보여주면, 고객은 준거 기준이 높아지기 때문에 그 900달러짜리 캐리어를 사지 않더라도 기존의 예산을 초과해 250~300달러의 캐리어를 구매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설명입니다. 간단히 말해, 최고가의 메뉴가 구매자의 지불 용의 가격 수준을 높인 것입니다. 따라서 900달러짜리 캐리어는 팔리지 않는 효자상품이라는 아이러니한 별명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책을 읽다 보니 제가 얼마나 많은 최고가의 상품을 보며 저거에 비해 난 알뜰한 소비를 한 것이라며 탕진 탕진 탕진 잼을 즐겼는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Bob Bob Richard의 곳곳에 숨어있는 '숨은 의도' 들을 보다 보니, 떠오르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리처드 탈러의 <넛지>입니다. 저자는 '어떤 행동을 하도록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라는 뜻의 Nudge를 행동 경제학 분야에 확장해 전 세계 베스트셀러 저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저 또한 홍보/광고를 공부했던 학생으로서 응당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놓고 옆구리에 끼고만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두꺼워서 라면 받침으로도 쓰지 못하는 이 책을 꼭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각설하고, 저자가 사인을 해 줄 때마다 적는 문구가 있다고 합니다. 'Nudge for good',
좋은 목적을 위해 넛지를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좋은 메뉴를 대접하면서도 대접하는 자와 받는 자 모두 기분이 언짢지 않은 숨은 메뉴판, 언제든 샴페인을 주문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는 분홍빛 샴페인 주문 버튼, 선택을 이끄는 메뉴판까지. Bob Bob Richard를 방문하는 고객들이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넛지들을 간접경험하며 저 또한 선한 의도를 가진 선택 설계자가 될 수 있길 다짐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
제가 이번에 소개해드린 <퇴사 준비생의 런던>은 Bob Bob Richard를 제외하고도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향수 브랜드 '조 말론 런던'의 창업자 조 말론의 향수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담은 조 러브스, 동네를 예술가로 채우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카스 아트,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종이 잡지의 생존 방법을 보여준 모노클 등등 과거를 지우지 않고도 미래를 만들어가는 런던의 다양한 비즈니스 인사이트를 찾아볼 수 있었던 책입니다. 또, 책 내용과는 별개로 여행에는 다양한 목적 와 모습이 존재하고 답사로서의 여행 또한 매력적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고요. 분명 저도 다녀온 적 있는 같은 런던이지만, 누가 어떤 마음으로 다녀오느냐에 따라 도시는 이렇게나 다양한 인상을 보여주더군요.
이 책의 특이한 점은 마지막 페이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던 어디서든 이 책의 뒤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말랑말랑한 마무리입니다. 꼭 런던에 가지 않더라도 어디서든 틀을 깨는 '힌트'를 얻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