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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Nov 03. 2020

여행지에서 읽는 여행 이야기

김영하, 여행의 이유

읽고 본 것들을 꼬박꼬박 기록하겠다고 마음먹지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막 독서/관람을 마쳤을 땐 온갖 신선한 생각을 이 머릿속을 꽉 채우는데, 더 생각을 정리해서 써야지, 주말에 편하게 써야지, 하며 미루다 보면 당연히 전부 증발해버리고 없다. 그렇게 날려보낸 책과 영화들을 거쳐..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리라 후다닥 감상을 적어본다. 이렇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여행지에서 여행 아닌 여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니 여기서 이 책을 읽기 참 잘했다.

모두가 사랑하는 스위스는 나에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여행을 왜 할까? 숱한 질문 속에서 대부분 이 책에서 소개한 '추구의 플롯'에 따르면 외면적 목표를 늘어놓는다.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동시간대에 지구 다른 곳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많은 유적과 예술품을 볼 수 있고,, 하는 것들. 그런데 내가 그런 이유로 정말 여행을 좋아하는지 한 번 더 물어보면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외면적 목표로 포장해 둔 내면적 목표가 드러난 시간이다.

  나는 여행지에서 느끼는 낯선 감정을 좋아했다. 내가 낯선 사람이 되는 것도, 낯선 무언가를 낯설게 혹은 낯설지 않게 만나는 것 모두 좋아했다. 하루 종일 누군가와 함께 일하며 늘 평가받는 느낌에 전전긍긍하던 중 떠난 여행에서는 주말에 시가지를 쏘다녀도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기분이 좋았다. Nobody가 되는 해방감을 혈관 닿는 모든 곳에 도달하게 하려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얘기로 여행지에서 발견하는 나의 낯선 모습 또한 사랑한다. 내향형 인간 중 가장 외향형이어서 그 경계를 줄타기하며 항상 고통받는 현실의 나와는 달리 여행 중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외향적인 모습이 그 후에도 나는 전혀 싫지 않다. 그럴 수도 있는 거다. 조금 더 나한테 너그러워진다. 운동이라면 젬병이고 겁도 무척 많은데 제트스키를 타보기도 하고, 발도 닿지 않는 곳에서 인생 첫 스노클링을 도전했다. 거기선 잠깐 한국에 돌아가면 내가 잘 못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시도도 안 했던 모든 것들의 문을 조금씩 두들기며 살아야겠다는 건강한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나는 책을 읽으며 작가와 나의 여행의 기억들을 겹쳐보고 놓치지 않기 위해 프런트에서 빌린 '볼펜'으로 이 책에 밑줄도 쭉쭉 긋고, 심지어 내 생각까지 적어가며 완독했다.

    낯선 언어로 가득한 곳에서 계획대로 시내로 이동하고 교통카드를 만들고 숙소에 체크인해 방에 들어왔을 땐 일상생활에선 놓치고 있던 감정 중 하나인 '성취감'을 마음껏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중화권에 갔을 때 짧은 만다린으로 필요한 것을 해결하거나 혼자 온 여자를 향한 호기심 어린 질문에 대꾸했을 땐 정말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았다.

  낯설지만 익숙한 무언가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것도 좋았다. 먼저 정방형 속 세상에서 잔뜩 보던 랜드마크나 유명한 음식점을 맞닥뜨렸을 때, 마침내 드디어 마주친 오래전 친구 같은 기분이 든다. 고대하던 것이 실체가 되고 나는 거기서 그동안 보아왔던 것 위에 새롭게 내 감상을 덧칠한다. 많이 봐와서 익숙할 줄 알았던 것들이 다시금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아름다운 오르셰 박물관



  김영하의 여행이라고 하니, 모든 여행의 순간이 소설의 문장을 이루고 어디서든 글을 쓰는 디지털 노매드 일 것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기 전 호캉스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었을 때, 그와 공유하고 있는 무언가(물론 일방적인 유대감이다)를 느낄 수 있었다. 일상의 압박감이 묻어나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 멀리 떠나지 않아도 서울에서도 그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호텔이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여행을 통한 낯설어지는 경험을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나는 어느 나라를 가든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너무 고심하지 않는 편이다. 운 좋게 맛있으면 맛있어서 좋고, 대실패를 하면 글로 쓰면 된다./16p

여기 와서 숱한 칵테일을 마시며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내가 아는 그 맛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역시 그러해 조금 실망스럽던 차에 이 문장을 만났다. 그래서 나도 '썼다'. 모든 사소한 에피소드가 소재가 되는 일상의 활기가 좋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각성을 대체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나 찾아온다./22p
꼭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었던 지베르니의 정원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을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51p


동남아가 이렇게 더운 줄 몰랐던 동남아 초보의 카페콕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109p

 유럽여행에서 많은 짧은 인연을 만나며 입버릇처럼 했던 말 중 하나는, 지금 이 여행이 좋은 이유는 불완전한 나의 미래(당시엔 3학년을 마친 휴학생이었다)에 대해 고민할 필요 없이 오늘, 내일, 이 도시에서의 일과만 걱정할 수 있어서라는 것이었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일 뿐이다./155p

끝으로 이 책을 선물해 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어릴 땐 우정이나 사랑이 모든 것을 공유하고 비슷해야만 성립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자신부터가 나에게 100%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이란 걸 깨달을 정도로 자라남과 동시에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요즘 느낀다. 여행 취향이 기가 막히게 비슷한 친구가 있고, 같은 책을 읽고 눈물을 훔쳤다는 친구도 있다. 누군가는 나에게 전혀 생경한 세계를 소개해주기도 한다. 저마다 나와 조금씩 초록동생의 교집합을 공유하고 있으면 우정의 성립 조건으로는 충분하다. 이 책을 선물해준 친구는 나랑 여러모로 잘 맞지만 그중에서도 읽고 생각하는 바가 잘 통하는 친구다. 막상 떠나기 전 조금은 불안하고 조금은 우울할 때 도착한 선물 때문에 방금 일어나 퉁퉁 부은 상태에서 눈물 셀카를 찍을 수 있었다. 단순히 여행을 소재로 하는 책이기 때문에 유사 여행을 떠나는 나에게 잘 어울릴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덧붙인 편지의 내용처럼 이 책은 굳이 굳이 챙겨온 종이책의 부피만큼 조금씩 공허한 마음을 꼭 맞는 퍼즐 조각처럼 채워줬다. 오랜만에 손끝에 닿는 종이책의 감촉이나 냄새가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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