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p3 형식의 라이선스가 중단됐다.
버디버디가 서비스를 중단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때랑 기분이 비슷했다. 음악 파일의 확장자 이름인 엠피쓰리는 그것을 재생하는 엠피쓰리 플레이어의 이름이기도 했다. 샤프심만 한 것부터 지금 스마트폰 크기에 준하는 것 까지, 크기와 모양은 제각각이었지만 우리는 모두 하나씩 지니고 다녔다.
'노래 같이 들을래?'는 일종의 친밀감의 표현이었고, 친구의 선곡에 귀를 맡기는 것에서 묘한 일체감을 느꼈다.
시험기간을 앞두고 자습시간을 주시면 꼭
"엠피쓰리 들어도 돼요?"라고 물어보는 애들이 있었다.
한 명이 물어보고 나면 모두가 손에 이어폰을 쥐고 선생님의 대답이 긍정적이기만을 기다렸는데.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사용할 때는 재생목록이 최고의 고민거리였다. 최신순으로 아무렇게나 섞여있는 것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몇 개로, 어떤 기준으로 나눌지, 한 재생목록 안에서는 또 어떤 기준으로 배치할 건지 모든 것이 중요했다. 가수끼리, 한글 자음 순으로, 내가 좋아하는 순서대로, 재생목록은 이렇게 나눴다가 또 저렇게 나눴다가. 이 모든 게 나의 취향을 곱게 갈아 넣는 일이었다. D중학교의 교복을 입은 1학년 460명 중 하나인 내가 나의 아이덴티티를 담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스마트폰을 손에 달린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재생목록'에 대한 소중함도 없어졌다.
핸드폰 용량이 부족하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벅스>를 삭제했다가 다시 까는 나를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어, 나 노래 되게 좋아했던 것 같은데. 재생목록을 함부로 동기화시켜버린 동생을 깨워서 집안이 떠나가라 화냈던 것 같은데. 친구가 내 엠피쓰리를 같이 듣자고 했을 땐 내 취향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묘하게 자랑하고 싶었는데.
내 고유한 취향과 개성을 보여주는 디바이스였던 엠피쓰리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똑같은 머리에 똑같은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그때에는 엠피쓰리 외에는 나의 취향을 오롯이 담을 그릇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지금은?
지금 나는 어디에 나를 담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을까. 날이 갈수록 획일화되려고 노력하는 기형적인 사회에서 온전한 나는 어디 담아두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자소서 속 나는 진취적이고, 열정적이고, 직무역량이 뛰어나고, 성실한 인재인데 눈물 많고, 생각 많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잘 인정하지 못하는 나는 어디에 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