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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17. 2020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bgm은 그레이-하기나 해

열정은 더운 날씨에 녹아내려버렸고 유난히 월급 마취제의 약효도 잘 안 받는 것 같은 11번째 월급날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약이 잘 안 드는 것 같을 땐 두세 번 다시 마취총을 쏴주던데... 현실의 삶은 마취가 안된 대로 버텨야 했다.

  지난한 오후를 견디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 대학교 2학년 때 보고 파리에서 무려 5년 만에 만난 친구가 인턴을 하러 한국에 들어와있어서 다음 만남인 오늘까지의 간격은 3개월이었다. 3개월치 근황 토크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너는 퇴근하고 뭐해? 하는 질문에 자동반사적으로 '아무것도 안 해'라고 했다. 진짜 아무것도 안 하기 때문이다. 간간이 운동도 하고 가끔 영화도 보고 하지만 지인들을 만나는 약속을 제외하고는 입사하고 1년 내내 뭔가를 꾸준히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너는? 하고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 나도 너처럼 통근시간이 머니까, 나에게 주어진 작은 자유시간이 너무 아깝더라고. 아무것도 안 하면 내가 회사만 다니러 사는 사람 같잖아."

 여기까지는 나도 한 1,000번은 더 했던 생각이었다. 특히 겨울엔 해가 뜨기 전에 출근해 집에 오면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회사 다니러 사는 사람인가, 살려고 일하는 거지 일하려고 사는 게 아닌데.. 하는 생각들을 정말 자주 했다. 친구랑 나의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런 상황에 불만을 갖고 불평하고 있었고 친구는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으니 회사 외에 생산적인 일들을 한다고 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1시간 운동하고 저녁 먹고 언어(친구가 지금 공부 중인 나라 언어) 공부 1시간 하기. 그러고 남는 시간은 TV를 보던 쉬다가 잠든다고 했다. 그걸 매일 한다길래 지치고 힘들지 않냐고 물어봤다. 돌아온 답이 아주 내 머리를 세게 쳤다.

"그냥 난 습관으로 만들면 잘 하는 편이거든. 습관 삼아서 별생각 없이 해. 안 하면 불편해"



 퇴근하면 아 오늘 운동 가야 돼.. 끝나고 영어공부도 해야 돼.. 하는 부담에 질려버려서 행동으로 옮기기를 번번이 실패했던 나랑은 달리 친구는 그것들을 굉장히 무의식의 영역으로 옮겨서 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일어나도 씻는 순서는 똑같은 것처럼. 이렇게 습관으로 만들고 나니 친구는 거르게 되면 오히려 불편하다고 했다. 나에게 가장 강렬한 친구의 기억은 17살인데 안 본 사이에 정말 많이 성숙해졌다고 느낀 날이었다. 물론 나는 매일매일 정시 퇴근하고 집으로 달려가는 게 어려운 환경이지만 적어도 친구와의 만남에서 아주 배울만한 마음가짐을 배웠다.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 제목을 빌리자면 이런 게 진정한 '힘 빼기의 기술'이었다. 대단한 고뇌를 거치지 않고 그냥 하기. 성취감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소극적인 완벽주의가 있어서 시도를 어려워하던 나의 고질병에 (사실 회사를 다니면서 더 심해졌다) 약간의 균열을 내는 말이었다. 그리고 균열 사이로는 늘 빛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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