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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17. 2020

PC off 1일 차 후기

pc 말고 업무도 off 해주시죠


결론: 업무도 off 해라



오늘은 pc off 제도의 첫 시행일이다.
이름대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pc가 꺼진다
목적은 무분별한 초과근무로부터 근로자의 권리를 지키고 개개인에게는 워라밸을 함양하기 위함이다.

     이전에도 일과 가정의 양립, 워라밸 등등 사회적 시류를 따르기 위해 정시퇴근 제도를 안내방송까지 해가며 운영했지만 회의를 하느라 그 방송을 못 들은 날도 많았다. 그래도 제도를 도입해 물리적으로 pc를 꺼버리니 처음엔 잡음이 많겠지만 차츰 정착을 하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관련 내용 전파교육 때 선임들은 제도를 벗어나 야근할 방법을 내놓았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또 나만 순진했지.

     놀랍도록 지겹지만 루틴 하진 않은 업무 특성상 야근이 불가피한 날도 정말 많다. 오늘 좀 집에 빨리 가겠다고 불편하게 일을 미루느니 그냥 빨리 끝내는 게 더 좋을 때도 많다. 이런 날은 그럼 어떻게 하지? 제도는 이렇게 말한다. 추가 근무에 대한 결재를 올리면 그 시간만큼 더 일할 수 있다. 합리적이다. 두 가지 조건을 더 듣기 전까지는.

     첫 번째, 월급에(시대착오적이게 포괄임금제이다) 포함된 고정 O/T 10시간은 따로 차감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월에 10시간이 넘게 야근을 하면 추가 수당을 반드시 지급해야 한다. 전례 없던 추가 수당의 개념이 변화에 날을 세우는 조직을 파고든 것이다.

      두 번째, 팀원들의 추가 근무가 난무하면 팀장 KPI에 영향을 준다. 조직원 관리 역시 리더의 업무이니까. 고로, 내가 정당한 제도를 통해 야근 결재를 올리면 인사팀에서는 나에게 여태껏 줘본 적 없는 추가 수당을 줘야 하고 팀장님은 고과에 미약하게나마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도둑 야근'이 시작된다. 일이 많아서 더 하는 것도 썩 유쾌한 일이 아닌데 이제 남의 눈치까지 봐야 한다. 5:40분이 넘어가면 허겁지겁 파일 보안을 풀어 개인 계정으로 보내고 집에서 다시 메일을 연다. 칼퇴해도 집에 가면 8시. 그냥 8시까지 일 하면 집 가서 맘 편히 잘 수 있는데 이제 집으로 '출근'을 해야 한다.

    계약서에 작성된 시간만큼 성실이 업무를 이행하고 초과 근무를 하게 되면 계약 외 시간인 만큼 보상을 더 받는다. 평소엔 여섯 시가 되면 미련 없이 가정으로, 각종 욕심을 해갈시켜줄 학원이나 동호회로 나의 삶을 찾아 떠난다. 우리가 뭐 사랑과 의리로 만난 사이도 아니도,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다들 제 초과수당 직접 본인들 급여에서 빼 주시는 거 아니고, 팀장도 팀원들을 평가하듯 팀원도 팀장을 간접적이 게나마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조직이어야 서로 잘하려는 건강한 긴장감이 감도는 거 아닌가요? 다 못 외우게 빼곡한 취업 규칙을 두고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나요.


      허울뿐인 제도를 만들고 우리는 이만큼 변화했다고 안주하면 실제로는 속이 빈 만큼 퇴보하기 마련이다. 오늘은 일단 퇴근하고, 내일은 퇴사를 해야겠어요,라고 한 선배가 다다음주면 돌아올지 모르는 휴직에 들어가는 선배에게 말한다. 팝업창이 빨간 글씨로 00:00으로 바뀌면 맥없이 꺼지는 데스크톱처럼 힘이 빠지는 월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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