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보다 날카로운ㅣ 연무처럼 퍼지는 서글픈 애(愛)
남자의 부모님을 만나 뵌 뒤 그로부터 6개월 후, 가을이 시작되는 10월에 우리는 결혼했다. 적어도 첫 아이를 품에 안기 전까지, 나는 그 집의 고요함을 단정한 평온이라 믿었다.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파란 지붕의 집을 향했다. 낮은 천장 아래 노란 등 하나만이 위태롭게 거실을 밝히고 있었다. 어둑한 불빛 아래서 남자는 외투를 벗기도 전에 마치 제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러워졌다.
거실 안쪽, 시아버지는 고봉밥을 말없이 비워내고 있었다. 숟가락이 사기그릇을 긁는 마른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아들 내외가 들어서자 어머니는 어느새 밥상 위로 아들을 위한 하얀 쌀밥을 산더미만큼 올려 자리를 비워두었다. 내가 어색하게 서 있자 어머니가 부엌에서 커다란 대접을 들고 나왔다. 그 안에도 수북하게 쌓인 하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밥만 잘 먹으면 된다. 이만큼 주랴?”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이 아니었다. 손사래를 쳤지만 꾹꾹 눌러 담긴 밥의 무게가 내 손목을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어머니의 시선은 오로지 남편에게만 고정한 채, 비밀스러운 주문처럼 속삭였다.
“이 사람, 이 밥 잘 먹어.”
어머니에게 ‘이 밥’은 단순한 곡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농토에서 길러내고, 자신의 손으로 지어낸, 아들을 붙들어 매는 가장 확실한 밧줄이었다. 남편은 산더미 같은 밥을 거절 한 번 없이 전부 비워냈다. 그리고는 밥공기에 물을 붓고 마시더니,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카—” 하는 소리와 함께 길고 당당한 트림을 내뱉었다.
촬영 현장에서 미세한 음향 신호까지 잡아내던 나의 신경은 그 소리에 미간이 찌푸려졌고 속이 거북했다. 나에게 '소리'란 타인을 향한 예의이자 정교한 약속이었다.하지만 파란 지붕 아래의 소리는 누구의 시선도 거치지 않은 채 공중으로 흩어졌다. 악의도 무례함도 없지만, 의식하는 필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당당한 무심함이었다. 의도 없는 그 소리에 나는 체한 듯 명치끝이 답답해졌다.
식탁 위의 풍경은 늘 같았다. 내가 정성껏 맞춘 그릇들의 열(列)은 어머니의 손이 닿을 때마다 소리 없이 무너졌다. 갓 해 놓은 찬들은 자석에 이끌리듯 슬그머니 아들 앞으로 모여들었다. 누구도 이 기이한 재배열을 지적하지 않았고, 남편 역시 당연하다는 듯 어머니가 밀어준 찬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그 집안의 오래된 중력 같은 것이었다.
찰박, 찰박.
물속에서 금속 숟가락이 그릇을 훑는 소리가 거실의 공기를 날카롭게 긁었다. 아버지가 보리차에 만 밥알 하나까지 정교하게 긁어내자, 옆에서 똑같은 박자의 소리가 이어졌다. 남편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복사해 둔 인형처럼, 똑같은 각도로 고개를 숙이고 똑같은 소리로 밥알을 건져 올렸다. 한 톨의 낭비도 허용하지 않는 그 행위는 식사라기보다 하나의 의식에 가까웠다.
이른 새벽, 부엌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도마 소리에 눈을 떴다. 눅눅한 이불의 감촉이 피부에 달라붙어 기분이 이상했다. 거실로 나가니 남자가 텔레비전을 켠 채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때, 화장실 쪽에서 벼락같은 시아버지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어허! 정신을 어디다 두고!”
놀라 멈춰 선 나와 달리, 남자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 그는 불이 켜진 채 비어 있던 화장실로 향했고 스위치를 끄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그는 올릴 필요도 없는 고무줄 바지춤을 습관적으로 추켜올렸다. 발뒤꿈치가 바닥을 닿을 때마다 쾅쾅 울리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 소리가 유난하여 사다 준 실내 슬리퍼는 서울 집 침대 밑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슬리퍼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처럼 대했을 뿐이다.
나는 그 군더더기 없는 동작에서 남자의 깊은 '습(習)'을 보았다. 아버지의 호령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기계적인 정중함은, 그 호령 아래서 수십 년간 길들여진 생존의 문법이었다.
어머니의 눈에는 아들만 보였고 그 대접을 받으며 살았지만 지극히 어머니를 안쓰러워하는 서글픈 애(愛)가 사무쳐 있는 서늘함이 숨 쉬는 유일한 공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의 방향은 온전히 당신의 것인가요? 아니면 지독한 '습(習)'이 만들어낸 것 인가요?
다음 화, [제6장 : 말이 닿지 않는 시간]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