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길을 내다.
다시 파란 지붕의 집이다.
24년 전, ‘누구의 아내’로 첫발을 떼었던 시댁(媤宅).
입춘이 지났다지만 논밭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그래도 코끝에 스치는 공기엔 미세하게 봄 내음이 섞여 있었다.
겨울이 가고 있다는, 아주 조용한 신호였다.
어머니의 병세는 차도가 없다. 그저 지켜보아야 하는 시간이 지속될 뿐이다.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 그 고요함이 남편에게는 거대한 부채처럼 보였다.
그동안 무던히 애를 쓰던 남편은 태연한 척했지만, 나는 그의 피로를 읽었다.
예전의 나라면 집 안의 무거운 공기를 지우려 괜한 말을 걸거나 활기찬 척을 했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오롯이 그가 감당하도록 두는 것.
그것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존중이라는 걸 이제 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은 변함없이 정적이 흘렀다.
*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잔잔한 하루들이 이어졌다.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남편이 내 앞에 우두커니 섰다.
잠시 망설이는 것인지, 말을 고르는 것인지. 남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희망퇴직을 받기 시작했어. ……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평생 가족이라는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살아온 남자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질문은 동의를 구하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상태를 알리는 고백이라는 걸 이제 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하고 싶은 게 있어? 마음 가는 대로 해. 당신 그동안 충분히 애썼잖아.”
그리고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어떻게든 살아지니까, 부담 갖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비난도, 과장된 위로도 섞이지 않은 맑은 진심이었다.
나를 살피던 남편의 시선이 이내 정면을 향했다.
내 대답 앞에서 그는 한 가정의 벽이 아닌,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한 사람으로 남겨졌다.
*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삶은 생각보다 정직해서, 내 안의 엉킨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내자 숨 막히던 일상에도 조금씩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독립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준이는 인턴을 시작하며 회사 근처로, 민이는 학교 기숙사로 떠났다. 아이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건 쓸쓸함이 아니라, 투명한 고요였다.
이 견고한 집이 공기의 흐름을 가두고 있었다는 것을, 그 속에 머물다 보니 더 잘 보였다.
며칠 뒤, 나는 남편에게 집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앞뒤로 창이 마주 보고 있어 바람의 길이 시원하게 뚫린 곳이었다.
“여기로 이사하고 싶어. 방 하나는 내 작업실로 쓸 거야.”
나의 제안에 남편은 화면 속 집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몇 초 뒤 남편은 조용히 말했다.
“…… 그렇게 해.”
그의 짧은 수긍과 함께 긴 시간 유지해 온 정적이 맥없이 흩어졌다.
집을 정리하던 날, 식탁 한쪽에 놓인 남편 회사 로고가 박힌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나는 펜을 들어 표지 한 편에 내 이름을 한 자 한 자 눌러썼다.
윤 지 수.
사각거리는 필치가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그것은 나를 오롯이 새겨 넣는, 고요하고 단단한 증명이었다.
가슴속의 눅눅한 습기가 걷히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새로운 계절이 건네는 첫 번째 인사였다.
나는 멈춰있던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길게 내쉬었다.
글ㅣ 윤희오 (hio)
12화 환기(換氣)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지금까지『숨의 방향』을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