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해독(解讀)

첫 번째 환기 ㅣ 6시 저녁

by 윤희오 hio



횡단보도에서의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지독한 안갯속에 갇혔다. 몸은 관성에 따라 움직였으나 가슴 한구석에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경고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엔진이 서서히 달궈지는 시간이었다.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선명한 자각이었다.


그동안 나는 결혼생활이라는 환경에서 마주한 상처들을 거대한 이불속에 묻어두기 급급했다.

한 번도 들춰보지 않은 그 상처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라는 성벽 아래서 안전을 담보받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산소 없는 방에 갇힌 듯한 답답함은 날마다 몸집을 키웠다.



*


팔순이 넘은 친정엄마의 웃음소리가 전화기 넘어까지 들렸다. 노부부의 여행 후일담은 유쾌했다.

한 참을 웃으며 통화를 끝내자 준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뒤따라 민이도 내 옆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재미있으셨나 봐요. (웃음)

엄마는 이야기할 때 정말 잘 웃는 것 같아요.”


준이가 툭 던진 말에 민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맞아. 엄마는 외갓집 가서 이모들이랑 떠들 때 보면 딴 사람 같아. 막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잖아.”

“엄만 다른 아줌마들이랑은 좀 다르지"

갑자기? 뭐가 다른데?”

내가 짐짓 무심하게 물었다.


“음... 다른 아줌마들처럼 막 혼내지 않잖아.

다 알아도 맞춰주고 존중해 주는 스타일?"


괜히 인정받은 기분에 우쭐했다. 위로를 해주는 것처럼 들렸다.

아이들이 읽어낸 것은 내가 애써 숨겨온 나의 ‘결핍’이었다.


내가 나다운 색깔을 잃어갈 때, 아이들도 이 집의 무거운 정적을 함께 견뎌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미안함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지키려 했던 것은 남편의 방향에 맞추려 했던 행동이었고, 점점 자신의 호흡법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


오후 5시 50분.

‘왔어’라는 신호와 함께 남편은 어김없이 정해진 순서대로 옷을 갈아입고 씻은 뒤 식탁 앞을 서성였다.

당연한 권리를 기다리는 손님 같은 태도였다.


“나, 이제 예약 손님 받듯이 밥상 차리는 거 안 하려고.”


내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남편은 고장 난 기계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1초, 2초, 3초… 정지 화면 같은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입력된 질문을 로봇처럼 뱉어냈다.


“어? 밥... 안 먹어?”


그때, 공기를 깨고 준이가 거실로 나왔다.


“아빠. 라면 드실래요?"

형! 매운 라면이랑 짜장 라면 같이 먹자. 엄마도 드실 거죠?”


아이들은 주방으로 달려가 냄비를 꺼내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소란이 거실의 묵직한 정적을 단숨에 밀어냈다. 주도권이 순식간에 아이들에게로 넘어갔다.

나는 남편의 무거운 침묵을 뒤로하고 소파를 고수한 채 앉아있었다. 정해져 있는 기능을 자의적으로 멈췄다.


*


문을 닫고 침대에 가만히 누웠다. 명치를 누르던 응어리가 비로소 작게 진동하며 풀려나갔다. 그동안 나는 인내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그토록 애처로워하면서도 그저 바라만 보던 그 뒷모습, 참아내기를 반복한 남편의 어머니를 복제해가고 있었을 뿐이다.


집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타인이 열어준 창문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 폐부 깊숙한 곳을 열어젖히며 시작된 첫 번째 환기였다.


글ㅣ 윤희오 (hio)




오늘, 당신은 편안한가요?

다음 화, [제12장 : 환기(換氣)— 바람의 길을 내다.]로 찾아뵙겠습니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