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빨간 사탕이 맛있을까 파란 사탕이 맛있을까? 우리는 처절한 선택의 역사를 지니고 산다. 이가 아야 하니까 엄마는 하나만 고르라고 하셨지만, 사탕은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던가? 조그만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빨간 사탕은 며칠 전에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니다, 파란색 사탕이었나? 두 개를 모두 가질 수는 없으니 어찌 되었든 당신은 하나를 골랐을 터. 과연 3번이 정답일까 5번이 정답일까? 하늘의 태양처럼 정답은 하나이니 당신은 하나를 골랐을 터.(나는 이렇게 고르고 나서 항상 틀렸던 기억밖에 없다.) 조그만 일상의 선택부터 중대한 인생의 선택까지. 지금껏 우리는 수 없는 선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삶 말이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선택은 인간이기에 가능하다. 그러자 당신 옆에서 물잔을 건네주던 로봇이 곧바로 주장한다.
“나 역시 선택을 한다. 그러니 나를 생명체로 인정해야 한다.”
선택은 인간의 전유물일까? 기계 역시 가치관에 따른 선택을 하고 자신을 생명체로 정의한다면?
사이버펑크 장르는 색다른 관점으로 인간다움을 질문한다. 기계와 인간의 경계를 가르는 인간다움은 무엇일지 질문한다. 그 답을 찾는 첫 시작은 <매트릭스> 시리즈다. 영화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네오에게 수많은 수식어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네오는 무엇보다 ‘선택하는 자’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네오의 ‘선택’을 조명한다. 네오는 빨간 약과 파란 약 둘 중 하나를 고른다. 인간을 살리기로 결정하면서 네오는 평화롭게 마지막 전쟁을 끝낸다. 심지어 영화의 절대적인 전제처럼 보이는 ‘선택받은 자’도 네오의 선택에 따른 결과다. ‘선택받은 자’에는 수많은 후보가 있었다. 그는 수많은 가능성들 중 하나였다. 선택받은 자의 역할은 네오가 선택했고 믿었기 때문에 그 역할의 효력이 발휘될 수 있었다. 선택은 네오를 매트릭스 바깥쪽에 위치하게 한다. 여기서 선택은 개인의 가치관에 기반한다. 트리니티를 향한 사랑의 감정은 네오에게 강인한 의지를 만든다. 또 매트릭스 프로그램이 제시하는 비인간적인 선택지를 거부할 만큼 인간을 향한 네오의 애정과 믿음은 깊다. 이 모든 것들이 모여 네오의 선택을 만든다. 그리고 그 선택은 네오를 운명의 바깥에 위치하게 한다.
인간이 내리는 선택은 프로그램의 오류를 발생시킨다. 매트릭스는 완전함을 향해가고자 한다. 만일 완전함이 절대적인 것, 신처럼 모든 앞날을 내다보며 한 치의 오류도 없음을 의미한다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 할 수 있다. 불완전함을 내재한 인간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그는 불완전하기에 선택한다. 프로그램과 달리 인간은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정확한지, 또 그 결과는 무엇일지 알지 못한다. 무지의 상태에 놓여있지만 그는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힘이 있다. 이 힘은 인간에게 내재한 불완전성에 대적할 무기가 된다. 그는 선택을 하며 그 결과에 따른 모든 것을 흡수한다.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능숙해지며 더 나은 결과로 향해간다. 그렇기에 선택은 무기와 같다. 모든 것이 분명해 보였던 매트릭스에게 하나의 결정적 변수라면 선택을 내리는 네오라는 인간 그 자체다. 선택하는 인간 네오는 그 자체로 무기가 된다. 하지만 인간은 선택하게 됨으로써 불완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다워진다. 선택은 정해진 운명을 거부토록 한다. 낙원에서 살기로 운명 지워진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선택해 그 운명 바깥에 내던져진다. 아담과 하와는 고통을 얻고 운명의 존재는 사라졌다. 우리가 운명 속에서 살지 않는 이상 지금 내리는 선택은 수 없는 가능성 중 하나다. 또 그 선택 역시도 무수한 가능성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엇 하나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불완전의 굴레 속에 존재한다.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며 지금 이 순간에도 확실한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두고 인간이라 부르지 않던가. 오직 그의 믿음과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건, <공각기동대>(1995)에서 인형사 역시 자신의 선택을 강조하며 자신을 생명체라고 소개한다는 것이다. 인형사는 본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인 그는 네트워크 안의 존재다. 하지만 자신을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체”라 소개한다. 그는 자신이 의체에 들어간 것도, 공안 9과에 들어오게 된 것도 모두 자신의 선택이자 의지였다고 강조한다. 그에겐 스스로 설정한 목표가 있다. 네오처럼 ‘선택하는’ 인형사에게 자아가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자신이 설정한 가치관과 그에 따른 행동력은 분명 일반적인 기계들과 다르다. 인형사가 스스로를 생명체라 소개하는 것을 두고, 단순하게 SF 영화만의 상상력이라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를, 그리고 인간을 재정의해야 할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형사가 인간이 될 수 없다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살과 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기계와 인간 사이를 가르는 물리적 경계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물리적인 특징으로 둘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계로 사람의 신체 일부를 대체하는 것은 그렇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로봇이 점차 사람을 닮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그리 허황되어 보이지 않는다. 물리적인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면 이제 남는 것은 정신적 차원의 경계.
<블레이드 러너>에서 안드로이드가 지닌 인간성은 인간을 뛰어넘는다. 몸은 기계지만 영화 속 인간들보다 훨씬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다. 기계의 몸은 자유를 갈망한다. 자본주의 논리에 매몰된 인간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한다. 이에 더해 안드로이드는 인간에게 깨달음을 전한다. 기계인 로이의 죽음은 우리의 감정을 고양시킨다. 그는 누구보다도 삶을 사랑할 줄 알며, 다른 이의 삶 역시 소중함을 안다. 삶을 사랑할 줄 알던 이의 마지막은 언제나 우리를 숨죽이게 한다. 그 순간 기계로 이루어진 몸은 중요치 않다. 사이버 펑크 영화의 질문은 정신적 차원의 경계에 있다. 이 장르에서 기계와 인간의 물리적 경계는 모호하다. <블레이드 러너>가 그러했으며, <공각기동대>가 그러했고, <매트릭스> 역시 그러하다.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똑 닮아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고, 인간은 기계로 신체를 완전히 대체해 뇌만을 남겨두며, 디지털화된 신체를 활용해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여기서 무엇이 기계이고 인간인가? 인간다운 가치를 지닌 것은 누구인가? 비인간성에 매몰되어 스스로 기계가 되는 자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