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은색 원반이 땅에 박혀있다. 방금 저 커다란 게 하늘에서 떨어졌다. 내가 방금 봤어! 축 늘어진 채 원반에서 기어 나오는 저건 혹시 외계인? 이건 얼른 사진으로 찍어두어야 한다. 가만있어 봐, 이거 하나에 좋아요가 몇 개일까? 핸드폰을 꺼내 드는 순간 검은 양복 차림을 한 남성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음? 제이 요원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별안간 그는 선글라스를 낀다. 그리고는 품에서 볼펜 크기의 은색 물체를 꺼낸다. “자, 여기를 한 번 봐주시죠.” 밝은 섬광이 터진다. 멍한 기분이 드는데∙∙∙ 근데 여긴 어디야?
<맨 인 블랙>에서 기억은 다소 무자비하게 지워진다. 외계인과의 추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뉴럴라이저에서 밝은 섬광이 터지면 사람들의 기억은 지워진다. 요원들은 외계인과 마주친 기억을 지우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며 다른 기억으로 그 자리를 채워 넣는다. 그냥 웃고 넘길 일은 아니다. 외계인과 마주쳤던 당신의 기억도 요원들 손에 지워졌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기억이 변형되어도 당신은 인지하지 못한다. 기억은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사이버 펑크 영화에서 ‘기억’은 다소 섬짓한 소재다.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면모를 강조한 이 장르에서는 사이버 공간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기억으로 인간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가령 <블레이드 러너>에서 레이첼은 가족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가짜다. 안드로이드인 레이첼에게 주입된 가짜 기억이다. 레이첼은 가짜 기억을 자신이 사람임을 증명하는 데 사용한다. 인간이라는 정체성 형성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또 <공각기동대>(1995)에서 청소부의 사례를 생각할 수 있다. 청소부는 자신의 아내가 이혼을 통지하며 딸과 함께 종적을 감췄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가짜 기억이다. 청소부는 자신의 부인이 이혼하고자 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고스트 해킹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외부에서 주입된 기억은 그의 사고 전체를 통제했으며 고스트 해킹이라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이끌어 냈다.
분명 주입된 기억은 원래의 정체성과 모순된다. 청소부는 독신이었다. 이전까지 청소부는 혼자의 삶을 살았고, 그에 맞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아내와 딸이 있었다는 기억은 기존의 기억과 아주 모순된다. 청소부는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주입된 기억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들까지 교란시키는 과정을 거쳐 마치 원래 있었던 기억인 마냥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과거 기억은 인위적인 조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새로 주입된 기억에 맞게 스스로 모습을 바꾸기 때문이다. 청소부는 자신과 반려견이 찍힌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이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라고 말한다. 과거 기억이 새로 주입된 기억에 맞추어 모습을 바꿨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기억은 불변으로 남지 않는다. 어딘가 미화되고 왜곡되며 편집되는 지점이 분명 발생한다. 이렇게 기만적인 기억의 특성은 정체성마저도 변화시킨다. 조작된 기억을 주입할 수만 있다면 정체성을 바꾸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그럼 어디서부터가 가상의 기억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짜’ 기억인가? 레이첼과 청소부에게 심어진 기억은 환상이었다. 그들의 기억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기억이었고, 기만적이다. 때로는 지나치게 위험하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기억에도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우리의 기억은 정말 진실될까? 인간의 기억 또한 선택되고 편집된다. 지금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기억이 변형된 기억임을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필요에 맞게 기억을 변형하며 또 다른 가상의 기억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에 치일 때 어릴 적 기억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변형된다. 심리적인 위안을 얻기 위해서다. 헤어질 당시에는 싫은 점이 분명했지만, 막상 헤어지고 나서 좋은 이였다고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이 또한 심리적 위안을 얻기 위함이다. 필요에 의한 가상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나’. 라캉은 기만적인 자아를 이야기한 바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없다. 진짜 ‘나’는 누구일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영원히 기만적인 상태에 놓인 채 살고 있다 해도 무방하다.
분명 기억을 잘 활용한다면 취약한 상태의 인간을 보호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의 기억이 언제나 정확하고 망각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아픈 날을 모두 잊어버리지 못하고 고통받을 것이다. 또 단점투성이의 나를 마주하면서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난 한없이 불행한 사람이고 오류투성이야’라는 생각의 미로에 갇힌 채. 진짜 ‘나’를 알 수 없는 건 영원한 기만 상태에 빠지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축복이지도 않을까. 어리석음을 담보로 한 축복 말이다. 후에 우리는 어리석은 축복을 위해 기억을 주입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주입된 기억으로 형성된 정체성은 ‘나’로 인정할 수 있을까? 이로 인해 형성되는 정체성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저 환상일 뿐일까 아니면 또 다른 실재로, 또 다른 형태의 정체성으로 인정해야 할까? 아니면 우리는 금기의 영역을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참고자료>
유충현. "사이버펑크의 영화적 재현: 권력과 정체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문화과학 10 (n.d.): 206-213.
"왜 과거는 아름답게 미화되는 건가요?" 아하. n.d. 수정, 2021년 7월 15일 접속, https://www.a-ha.io/questions/46a0fddcc2022124935c8d42f6e245c1.
첫 번째 사진: https://i.gifer.com/7d48.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