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나에게 푸른빛으로 기억된다. 웅장한 음악과 파란 들판. 두 주인공이 달려 나간다. 히데코의 정신 깊숙한 곳까지 옭아매던 그림책들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물에 불어 사라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채 끝없는 푸른빛 속을 달린다. 달려가는 그들 앞에 햇살이 살며시 비친다. 나는 서로를 향해 웃는 둘에게서 문득 살아 숨 쉬는 자유를 읽었다. 싱그러운 웃음은 푸른빛과도 함께 얽혀 끝 모를 자유로 변신한다. 히데코와 숙희의 자유는 새파란 빛을 간직한다.
이 글은 <아가씨>의 한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서로를 마주하며 싱그러운 웃음을 터뜨리는, 푸른빛의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느낀 자유로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왜 보는 이에게 자유를 맛보게 하는가? 물론 상황적인 이유를 빼놓을 수 없다. 히데코의 정신을 갉아먹던 모든 것을 부수고 함께 들판을 달려 나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해방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코우즈키의 그림책들은 히데코의 감정을 빨아들인다. 그것도 아주 게걸스럽게. 코우즈키와 신사들이 욕망하는 것은 환상 그 자체다. 그들은 책 낭독을 통해 환상의 세계에 빠진다. 그 환상의 세계에는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 상대의 감정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히데코는 본인의 영혼은 삭제당한 채 환상의 일부가 된다. 그는 동물적 쾌락만이 가득 찬 그림책 낭독에 점점 메말라간다. 책들을 낭독하며 히데코는 자신의 감정을 빼앗긴다. 아니, 모든 감정이 꽁꽁 묶였다. 정신적 속박을 불사른 채 숙희와 들판을 달려 나가는 모습은 우리 역시 숨 트이게 한다.
히데코와 숙희의 얼굴에 서린 새로운 웃음에도 자유가 숨 쉰다. 분명 푸른빛의 들판은 이전까지 잘 볼 수 없었던 웃음을 피워낸다. 히데코와 숙희는 서로의 표정을 조각한다. ‘조각’이다. 서로의 표정을 어루만지고 다채롭게 한다. 둘의 맑은 웃음은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 여태 묶여있었다. 비단 웃음만이 자유를 되찾은 것은 아니다. 히데코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히데코의 거의 모든 감정은 깊숙한 곳에 묶여있었다. 숙희와 함께 하며 히데코는 비로소 자신의 표정을 되찾는다. 때로는 호기심 넘치는 표정을, 때로는 마음을 알아주는 이에게 눈물을, 때로는 분노하거나 혹은 절망하거나. 숙희 역시 순수함이 어린 웃음을 짓는다. 숙희가 이제껏 보여줬던 웃음에는 많은 쓰임이 있다. 서비스 용, 상황 모면하기 용 등등. 상대를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하나의 웃음은 이전과 다르다. 히데코는 숙희가 가진 단 하나의 웃음을 조각한다. 표정이 되찾은 자유는 둘이 함께 달려 나가는 장면에서 절정을 맞이한다. 둘은 서로의 표정을 조각해내고, 서로에게 자유를 선물한다.
둘 앞에 놓인 무한한 가능성 역시 자유를 발견한 이유 중 하나다. 히데코와 숙희가 함께 그림책을 파괴할 때 우리는 희열감을 느낀다. 이 감정은 파괴의 주체가 ‘둘’이기 때문에 더욱 강해진다. 우리는 둘로서 더해진 힘이 거대한 속박을 깨뜨리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힘을 확인한 우리에겐 어떠한 기대가 생긴다. 그들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직감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이제 어디든 뻗어 나갈 준비가 되었다. 히데코와 숙희는 서로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둘에 대한 확신, 그리고 이렇게 맞잡은 손으로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 그렇게 발견한 무한한 가능성은 희망을 향해 손 뻗는다. 서로에게 찾은 싱그러운 웃음에서 그들은 희망을 알아봤는지도 모른다. 제약 없는 가능성, 그리고 그에 바탕한 희망은 자유와 다를 바 없다. 푸른 들판으로 달려 나가는 둘의 표정이 그토록 자유로워 보였던 건, 두 사람 앞에 놓인 무한의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조각해낸 표정, 환한 웃음으로 맛보는 자유는 그보다 더 푸르를 수 없다. 우리는 두 주인공과 함께 푸른 들판 너머의 어딘가를 바라보게 된다. 보이지 않는 저 너머를 바라본다는 사실만으로도 해방감은 찾아온다. 그 너머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 우리는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끝없는 가능성을 탐색할 둘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새로운 날을 궁금케 하는 히데코와 숙희는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