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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란 Sep 05. 2021

<맨해튼> 욕망하는가 사랑하는가

이제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논의는 여기서부터다.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인용했다. 사랑을 논리적으로 이해한다! 뜬금없는 소리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사랑은 단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에리히 프롬) 위의 인용도 사랑을 단순한 감정의 문제로 보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이 글 역시 그와 같은 전제에서 출발한다. 여기에 조심스레 나의 견해를 더해보고자 한다. 나에게는 애정 관계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상처가 눈에 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병든 존재다. 정신적으로 병들지 않은 인간은 없다. 상처는 병든 인간을 만들고, ‘없음’을 만들고, 욕망을 만든다. 하지만 그렇게 형성된 욕망에 우리는 잘못된 이름을 붙이곤 한다. 욕망과 사랑은 종종 혼동된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말하기 전에 한 가지, 나는 무슨 자격으로 사랑을 논하는가? 사랑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자격이 있어야 할 것만 같다. 연륜이 필요할 것도 같고, 엄청난 양의 연애 경험도 필요할 것 같다. 나의 짧은 인생 그리고 현저히 적은 연애 경험으로는 사랑에 대한 글을 쓰기가 주저되는 것도 사실이다. 대신 여기서부터 시작해보고자 한다. 인간은 모두 병든 존재다. 그리고 그 병듦은 관계를 시작하게 한다. “인간은 모두 병들었다”라는 아이디어는 라캉에게서 가져왔다. 자신 안에 ‘없음’, 즉 결여가 존재함에도 그를 부정하는 분열된 인간을 라캉은 병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건 너무 어려운 이야기다. 내 식대로 단순하게 말해보자면, 모든 인간은 상처를 안고 산다. 그 상처가 아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품고 있는 상처는 그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 우리 모두는 그 상처로 병들어 있는 상태다. 여전하게도. 상처는 ‘있음’을 찾아 나선다. 상처는 그대로 존재하는 일을 참지 못한다. 상대의 ‘있음’으로 그 상처를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관계가 만들어진다. 상처는 욕망을 만들어내고, 관계를 만든다.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보통 관계가 진행된 이후 상대의 ‘없음’을 견디지 못하고 관계가 끝난다. (하지만 ‘없음’을 핑계로 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있다. 폭력은 용인하지 않겠다. 폭력은 견디는 게 아니다.) 상대의 ‘없음’을 발견하면 상처는 도망치고자 한다.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상대의 상처 역시 마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없음’이 드러날 때가 진정한 그 상대를 만나는 때다. 한 인간으로서의 상대를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상처로 인해 구멍이 난 한 인간의 모습이다. 서로가 가진 상처, 서로의 ‘없음’이 서로를 보듬고자 행동할 때 우리는 단단해진다. 비로소 우리는 그 견고함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 우리는 그 ‘없음’으로 인해 떠날 필요가 없어진다.




   

  <맨해튼>은 유독 애정 관계에 드러나는 개인의 병듦을 조명한다.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은 각자 병든 부분을 하나씩 꺼내 보인다. 이 글에서는 메리와 아이삭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본인보다 잘나다고 느껴지는 전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메리에게 구멍을 만들었다. 실패감을 안겨준 메리의 결혼은 그다음 연애에 영향을 미친다. 메리는 이혼 후 유부남과 연애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과 내연관계를 맺는 유부남을 경멸하면서 동시에 상대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욕망만을 따르는 남자가 아닌, 정신적 교류를 할 줄 아는 남자로 바꾸려 한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수준 높은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 아이삭은 그런 메리의 결함을 간파한다. “항상 본인이 상대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하거든” 잘난 전남편에게서 짓눌림을 당했다고 느끼는 메리는 유부남과의 연애를 통해 자신의 ‘없음’을 만회하고자 한다. 유부남과의 연애 관계를 통해 메리는 자신의 ‘없음’을 ‘있음’으로 채우려 한다. 유부남을 교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자신 상대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메리가 유부남인 예일과 교제한 이유도 그러했고, 17살과 교제 중이던 아이삭과 관계를 시작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겉으로는 어떠한 이유든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밑바탕에는 메리의 정신적 결함이 있다. 메리의 ‘없음’은 그런 관계를 ‘일부러’ 만들게 한다. 그래서 이것이 사랑인가? 아니, 욕망이다. 메리와 내연관계를 맺던 예일은 이혼을 한다. 싱글남으로서 메리와 관계를 이어가고자 한다. 그래서 둘은 사랑을 하는가? 끝내 그들은 서로의 결여를 책임질 수 있는가? 감히 예상해 보건대 메리는 예일을 떠날 것이다. 욕망을 좇아 가정을 파괴하는 데 일조한 자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구멍을 메우기 위해 메리는 또다시 움직일 것이다. 메리가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지 않는 이상 그 악순환은 계속된다.



트레이시가 여전히 아이삭을 사랑할 수 있을지는, 글쎄.


  아이삭도 다를 바 없다. 아이삭의 전부인은 결혼 생활 중에 동성애자가 된다. 이 경험은 아이삭에게 성적으로 모욕적인 경험으로 남는다. 아이삭은 그 이후 17살의 트레이시와 연애를 한다.(아이삭은 40대다) 메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17살은 “상처 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삭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트레이시를 부담스러워한다. 곁에 있고자 하는 트레이시를 밀어내기 바쁘다. 하지만 성적인 관계는 얼마든지 맺는다. 결국 메리와 관계를 시작하며 트레이시에게는 미련 없이 헤어짐을 고한다. 이러한 관계의 양상들은 모두 인물의 정신 가장 밑부분을 드러낸다. 그들의 정신 어딘가는 상처나 있고, 어딘가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그들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결여가 관계를 시작하게 했지만 의식적으로는 자신의 ‘없음’을 부정한다. ‘없음’을 부정하면서 욕망의 관계는 계속된다.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다. 나도 당신도 어딘가 결여된 존재다. 그 결여는 욕망을 만들고 관계를 형성한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관계를 정의 내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급하게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욕망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랑을 말한다. 경솔한 이름 붙이기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함정이 있다. 그 단어는 너와 나를 단단히 묶어주기도 하지만 도리어 그 단단함 때문에 상처가 나기도 한다. 욕망이 그 단어를 뒤집어쓸 때 상처는 더욱 커진다. 사랑이라는 이유 때문에 맹목적으로 욕망을 좇기 때문이다. 메리와 예일의 경우 사랑이라는 단어의 날카로움으로 예일의 아내에게 깊은 상처를 낸다. 또 메리는 부적절한 관계를 되풀이하면서 자신에게 상처를 낸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다. 욕망을 사랑으로 잘못 포장하며 상처를 내고 있다. 트레이시는 아이삭의 욕망을 사랑이라고 이름 붙인 데서 상처를 입는다. 아이삭은 트레이시를 믿지 않는다. 어린 트레이시가 아이삭 자신의 결여(많은 나이)를 책임지기에는 무리라고 여긴다. 트레이시는 그 믿음을 마지막에서야 얻는다. 하지만 이미 상처 입은 트레이시가 아이삭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다.



  욕망하는가 사랑하는가? 이제 우리를 들여다볼 시간이다. <맨해튼>은 타인의 연애를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게 한다. 메리와 아이삭에 공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우디 앨런 감독은 그 같은 효과를 의도했을 것이다. 내연관계와 너무나도 큰 나이 차이. 우리는 두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기보다는 영화 내내 그들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본다. 메리와 아이삭은 지금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지 않는다. 온도차는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자신이 하는 게 사랑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도 다를 바 없다. 나는 왜 당신을 사랑한다 믿는가? 지금 나는 당신을 욕망하는가, 아니면 사랑하는가?







<참고 자료>


인용 글: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http://m.cine21.com/news/view/?mag_id=73779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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