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걸 연구해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왜 게임이란 게임은 죄다 못하는가? 오래 전 엄마의 슬라이드 폰 안에 있던 조그만 게임에서부터 주니어 네이버(플래시 게임이 많았다)를 거쳐 닌텐도에 이르기까지.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는 모든 게임을 못했다. 왜?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게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대학생이 되고 말았다. 한 때 거의 모든 남학생들이 ‘롤’에 미쳐 있던 때가 있었다. 왜? 그 당시 친한 남학생이 없어서, 그리고 검색창에 ‘롤’ 한 단어를 쳐보지도 않았기에 그 이유 역시 찾지 못했다. 게임과 ‘롤’이라는 미지의 세계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어느 날 등장한 <아케인>은 다시 물음표를 불러왔다. 왜??? 왜 하필 게임 캐릭터인가? 왜 내가 2부와 3부가 공개되는 토요일만 기다리게 하는가? 시즌 2를 얼른 공개하게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등장인물들에게 “목소리”를 쥐여준다는 것이다.(바흐친) 어쩌면 게임의 IP를 활용한 작품이기에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캐릭터에게 애정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임의 특성상, 게임 유저를 더욱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날카로워지고 싶은 작가의 깜짝 추측이었다. 그들의 의도는 차치하더라도 어찌되었든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롤’)의 전략은 꽤나 영리하다. ‘롤’은 그 이전부터 스토리의 중요성을 알았다. 롤의 공동 창업자 브랜든 벡은 게임의 정체성은 스토리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토리는 확장을 위한 하나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송경원) 서사를 가진 게임 캐릭터는 우리의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틈을 만든다. 마블 히어로를 떠올리면 쉽다. 마블이 솔로 무비들을 통해 캐릭터마다의 서사를 쌓아 올린 이유는 그 틈을 만들기 위해서다. 누군가는 책임감과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가진 캡틴 아메리카를 제일 좋아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톡톡 튀는 유머와 뛰어난 기술력을 겸비한 아이언 맨을 좋아할 수도 있다. 이는 그들이 가진 매력, 캐릭터에게 애정을 쏟을 만한 틈이 그 서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롤 역시 마찬가지다. 마블이 세계관의 캐릭터를 하나하나 모아 점점 커다란 이야기를 그려 나간다면, 롤은 K/DA라는 아이돌 그룹, 그리고 지금의 <아케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다시 목소리로 돌아오자. <아케인>은 주연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목소리를 쥐여주면서 입체적인 서사를 쌓아올린다.(바흐친) 인물들의 첨예한 대립구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분명한 선과 악으로 규정할 수 없다. 또, 우리는 주변 인물들에게도 시선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각자의 서사를 가지고 각자의 이유로 투쟁하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 특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인물은 실코다. 그는 지하도시 자운의 독립을 위해서 무력이라도 사용하려 하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을 배신했던 ‘벤더’의 수양딸 징크스를 거두어들이고 그를 친딸처럼 생각하는 면을 보더라도 실코를 무조건적인 악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고 벤더를 무조건적인 선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벤더 역시 실코를 배신했던 인물로서, 평화를 위해서라지만 어찌되었든 실코를 살해하려 한 과거가 있다. 바이와 징크스는 어떠한가? 다소 과격한 면이 있지만 자신의 가족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바이의 우직함과 뛰어난 전투력은 과연 매력적이다. 징크스를 민폐 캐릭터로 볼 수도 있지만 징크스가 겪고 있는 정신적인 고통과 혼란, 그리고 애정을 갈구하는 눈빛은 우리에게 연민과 애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실코의 하수인으로 등장하는 세비카 역시 인상깊었다. 주연 캐릭터 바이와 대립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의리는 우리의 시선을 끄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렇게 입체적으로 인물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애정을 위한 틈을 발견할 수 있다. <아케인>은 각 인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일정 부분 시간을 할애하며 시청자가 공감할 여지를 만든다. 일반적인 선악 대립 구도를 만드는 영화가 그런 것처럼 당신이 꼭 주인공만을 좋아하도록 설계되지 않는다. 당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는 바이일 수 있지만, 당신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징크스를 가장 좋아할 수도 있다. 당신이 바이의 책임감과 우직함, 욱하는 성격을 매력으로 꼽는다면 나는 징크스의 혼란한 내면과 순간순간 보여주는 폭발력, 그리고 장난감처럼 꾸며놓은 무기들을 매력 포인트로 꼽겠다. 입체적인 이야기들은 당신이 가진 포인트만 맞는다면 그 어떤 캐릭터든 좋아하게 될 여지를 제공한다. 그래서 영리하다.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당신은 어쩌면 캐릭터 때문에라도 <롤> 유튜브를 기웃거리며 ‘게임을 한 번 시작해봐야 하나..?’ 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실제로 그랬다. 비단 캐릭터 뿐만 아니라 <아케인>이 던지는 질문들에도 시청자가 개입할 여지는 충분히 생긴다. 다양한 목소리는 이 시리즈가 특정한 교훈을 주는 데서 벗어나게 하며, 시청자의 해석이 개입될 여지를 제공하면서 보다 개방적인 형태의 작품을 만든다.(김태훈) 기술의 발전에는 명과 암이 뒤따른다. 하이머딩거 교수와 제이스∙빅토르 간의 대립에서 우리는 누구 하나를 쉽게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각자 타당한 이유가 있고, 당신의 대답 역시 옆의 사람과 다를 수 있다. 도시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 갖추어야 하는가? 군사력의 증강이 필요한가 아니면 외교력을 더 갖추어야 하는가? 이는 지금까지도 논의되고 있는 사안이다. 물론 우리가 자주 봐왔던 이야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시리즈가 이제껏 우리가 던졌던 질문들에 머무른다는 점은 아쉬운 느낌을 지우기 힘들게 만든다.(박진) 하지만 <아케인>이 스토리를 활용한 게임 콘텐츠의 성공적인 확장이라는 점, 그리고 스토리 상에서도 꽤나 효과적인 전략을 사용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가치는 있다.
지금까지 <아케인>에 관한 나름의 의견을 펼쳐보았다.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우니 잠깐 게임을 하고 끝내자. 맞추면 우쭐해지고 틀리면 아까 먹은 점심 탓을 할 수 있는 게임이다. 찍기 게임이다. 아직 <아케인>은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니, 앞으로 나올 시즌 2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관계를 찍어보자. 나는 제이스와 빅토르가 서로 대립하게 될 거라고 예상해본다. <아케인>은 스팀펑크 장르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보자면 과거의 시대(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뛰어난 미래의 기술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설정의 장르다. SF의 하위 장르다. 장르의 특성상, 그리고 점점 기계로 몸을 대체해나가는 빅토르의 행보를 바탕으로 했을 때 제이스와 빅토르는 서로 대립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에코와 하이머딩거 교수가 만들어 낼 시너지 역시 기대할 만하다. 곧 이어지리라 예상되는 제이스와 빅토르 간의 대립에서 제 3의 돌파구를 찾는 인물들이 될지도 모른다. 산업공해로 엉망이 된 자운에 자라난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근거로 들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한 번 찍어보길 바란다. 시즌 2를 더욱 재밌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으니까.
<참고 자료>
게임 덕후가 만든 놀이터, 끝나지 않을 확장과 진화 . (2021).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8978.
김태훈. (2010).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에 나타나는 서사의 다성성과 다양성. 불어불문학연구, 83, 165-197.
박진. (2006). 스팀펑크의 장르적 성격과 서사 담론 -<스팀보이>와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중심으로. 국제어문, 37(0), 225-251
이영수 (2012). 이중첩자 모티프 영상서사의 다성성(polyphony)적 변형 연구.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2(7), 29-39
실코 사진: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111260161
징크스 사진: https://m.mk.co.kr/news/economy/view/2021/11/10537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