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하나의 예감이다. 기분 나쁜 예감.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란 예감. 비장한 문장들로 시작했다. 이렇게 무게를 잡는 이유가 있다. <코렐라인: 비밀의 문>은 무서운 영화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당신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눈이 있는 자리를 더듬더듬 짚을 것이다. 눈이 단추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하면서.
코렐라인은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아이다. 일에 치여 바쁜 부모님은 코렐라인과 잘 놀아주지 않는다. 이제 막 이사를 온 동네에는 함께 놀 친구들도 없다. 이웃에 사는 또래 친구 와이본이 있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달리 할 일이 없어 새로 살게 된 집 안을 살펴보던 코렐라인은 단추 모양 열쇠로 열리는 조그만 문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날 밤, 코렐라인은 생쥐를 따라 작은 문을 통과해 또다른 세계로 향한다. 그곳은 단추를 눈에 단 엄마, 아빠, 와이비와 그 밖의 이웃들이 살고 있는 세계다. 다른 엄마, 다른 아빠는 코렐라인이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을 주거나 예쁜 새 옷을 사준다. 현실 세계와는 확연히 다른 부모님 덕분에 코렐라인은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다른 엄마는 실과 바늘, 그리고 단추를 선물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남고 싶으면 눈을 빼고 이 단추를 달아야 해! 색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단다. 빨강도 괜찮고, 주황도 괜찮고∙∙∙”
<안달루시아의 개>
눈은 영화 속 긴장감을 끝까지 끌고 가는 요소다. 과연 코렐라인은 다른 엄마에게 붙잡혀 눈에 단추를 달게 될까? 더 정확히 말하면, 과연 코렐라인은 눈을 빼고 그 자리에 단추를 꿰매야 될까? 우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숨죽여 지켜보게 된다. 눈을 공격하는 이미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쓰여 왔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다.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눈을 뽑았다는 대목 역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자신을 벌하기 위해 코를 부러뜨렸다고 해보자. 왠지 눈을 뽑았다는 것보다는 덜 아프게 들린다. 초현실주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에서도 눈을 공격하는 이미지가 있다. 눈을 면도칼로 베는 오프닝 장면은 지금까지도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눈을 공격하는 이미지는 오래 전부터 우리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왔다.
그렇다면 왜 하필 눈인가? 왜 하필 코도 아니고 귀도 아닌 눈인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로는 “가장 아파보여서”가 아닐까 싶다. 눈은 물렁물렁해서 약하다는 느낌을 주기 쉽다. 그렇기에 다른 부위를 다치게 하는 것 보다 아파 보인다. 또 다른 이유로는 텅 빈 공간을 만든다는 불안감, 그리고 무엇보다 어두운 공간에 갇히게 된다는 불안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텅 빈 공간 속 불안’을 이야기하기 위해 잠시 초현실주의 작품을 살펴보자. 초현실주의 작품 중에는 유달리 불길한 예감을 표현한 듯한 그림들이 있다. 대개 정적이며, 지나치게 고요해서 우울하고, 마음 속 어딘가의 불안을 자극하는 듯하다. 텅 비어 있는 어두운 공간은 이러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쓰인다. 이 공간은 그림 면적의 대다수를 차지하면서 불안감을 선사한다. 즉, “어두운 방에서의 불안하고 두려운 예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김수현, 1999) 단추 눈이 어떻게 생기는지 그 과정을 알기 전과 후는 확실히 다르다. 과정을 알기 전까지 단추 눈은 조금 징그럽다는 정도에서 그친다. 하지만 그 내막을 알고 나서부터 단추 눈은 우리의 불안을 더 깊이 건드린다. 눈을 빼고 단추를 달기 위해서 우리는 얼굴에 자리한 텅 빈 공간을 마주해야 한다. 단추를 달아 그 공간을 가렸다고는 해도 여전히 텅 빈 공간을 연상시키기에 단추가 달린 눈은 끔찍하게 보인다. 또 어두운 공간에 갇히게 된다는 공포 역시 여기에 한 몫을 한다. 눈을 빼야 한다는 건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단추를 달아야 한다는 건 그 공포를 건드리는 일이다.
다른 엄마
<코렐라인>이 무서운 이유는 또 있다. 이 작품은 일상 속에서 우리가 가진 불안을 건드린다. 일상 속 공포는 나의 삶에 직접 칼을 들이댄다. 우리는 그러한 작품을 보고 난 후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된다. 설마 이 때 귀신이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예를 들면 하필 침대 밑에서 귀신이 튀어나오는 영화를 봤다고 해보자. 살짝 불안한 마음을 가진 채 잠을 청하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 눈을 떴다. 발을 침대 밑으로 내리려는 찰나,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스쳐간다. 침대 속 귀신이 튀어나와서 나를 끌고 가지 않을까? 욕실에서 거울을 보는데 내 뒤에 귀신이 비치는 게 아닐까? 화장실을 가고 거울을 보는 등 평범한 일상이지만 우리는 문득 불길한 예감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일상 속의 공포는 나의 평범한 삶에 칼을 들이댄 채 “이런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라며 우리 머릿속에 경보를 울린다.
그런데 이 영화의 짓궂은 포인트는 부모님이 일상 속 공포가 됐다는 점이다. 그것도 어린이가 보는 애니메이션에. 감독은 어린이에게 줄 수 있는 공포 중 가장 무서운 공포를 선물했다.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한동안 두려움에 떨었다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가는 일이다. 부모님이 공포의 대상이라는 이야기는 양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극장을 빠져나와 부모님 손을 잡으면 안심이 되지만 동시에 ‘그렇지만 혹시?’라는 물음표를 남긴다. 가끔 부모님이 무섭게 화를 내는 모습을 봤을 때 아이들은 한 번 더 물음표를 가진다. 그날 밤 아이는 살금살금 깨금발로 자신의 불길한 예감을 확인하러 돌아다닐 게다. 밤에 엄마 눈을 보면 단추가 달려있을지도 몰라!
그 당시 극장 안에 앉아있던 아이들은 이 영화가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앞서 서술한 공포를 모두 겪어야 했다. 물론 <코렐라인>이 주는 공포는 재밌기도 하다. “긴장을 통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김정숙, 2013) 그렇지만 무섭다. 어른이 봐도 끔찍한 요소가 있고, 부모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그린 짓궂은 설정이 있으니 더 그렇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며 운 기억에 이불을 힘껏 차고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나라도 울었을 것 같다. 오늘은 엄마 옆에서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