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는 청첩장을 돌리고는 신나서 결혼계획을 읊었다. 축가로 본인이 정수라의 ‘환희’를 부를 작정이라고 했다. 환희는 희가 전 남친들과 헤어질 때마다 노래방에서 눈물을 토해내며 부르던 곡이었다. 88년생이 부르는 88년도 노래는 생소했지만 가사를 들어보니 알 것 같았다. 그 노래가 희의 애창곡이 된 이유를. 그건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희의 절절한 애도였으며 열망이었다.
어느 날 그대 내 곁으로 다가와
이 마음 설레이게 했어요 어느 날
사랑은 우리 두 가슴에 머물러
끝없이 속삭이고 있어요
그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이 순간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여요
이젠 나의 기쁨이 되어주오
이젠 나의 슬픔이 되어주오
우리 서로 아픔을 같이 하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걸
- 정수라 <환희>
우리 사총사는 결국 다 함께 축가를 부르기로 했다. 나와 수, 선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희는 잠깐 곁드는 정도로만 하는 게 모양새가 좋을 듯했다. 우리는 '축가 30일 완성' 미션을 시작하고 주 2-3회 코인 노래방에서 만나 노래 연습을 했다. 맨 정신으로는 불러본 적이 없기에 저녁식사에 꼭 반주를 곁들었다. 기대만큼 노래실력은 크게 향상되지 않았지만 대신 패기가 늘었다. 뭐 어떻게든 하면 되겠지 뭐.
결혼식 당일, 웨딩드레스를 입은 희는 눈이 부셨다. 원래도 이쁜 애가 사랑을 해서 더 이뻐 보이는 건지 헤메드(헤어메이크업드레스)의 힘인지는 몰라도 사랑의 아픔을 지워낸 희의 표정은 티 없이 밝고 아름다웠다. 울며 지새운 숱한 밤들도 언젠가 추억이 되는 것이었다. 어떨 땐 쿨하지 못하게 왜 저럴까 안타깝기도 했지만 희는 늘 사랑에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다. 상처받을까 봐 늘 나만의 Safe line을 벗어나지 못하던 나와는 다르게, 늘 사랑의 중심에서 사랑 그 자체로 희는 그곳에 있었다. (좀 오그라들지만 정말 그랬다) 연애상담을 해주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배운 건 나였다. 희는 자신의 어수룩한 모습에도 정면으로 계속 부딪쳐 맞서 싸웠다. 혹여 깨지더라도. 깨지면 좀 많이 아프긴 했지만은.
이런저런 생각에 감회에 젖어들던 참에 어느덧 주례가 끝나고 축가 순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핑크색 들러리 드레스로 맞춰 입은 우리는 맨 정신으로는 축가를 부를 엄두가 나지 않아 결국 맥주를 한 잔씩 들이켜고 무대에 올랐다. 처음에는 덜덜 떨려 목소리도 잘 안 나왔는데 두 번째 후렴구가 되니 자신감이 붙어 목소리가 커졌다.
희와 그의 신랑 석도 흥이 나서 따라 불렀다. 마지막 후렴구인 ‘우리 서로 아픔을 함께하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걸’이라는 구절을 부르는데 갑자기 목이 턱 막혔다.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는 게 뭔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티 안 나게 뒤돌아서 눈가를 훔치고는 수와 선을 바라봤는데 그녀들의 코끝도 빨갰다. 희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우엉으엉흐엉엉 알 수 없는 흐느낌으로 노래가 마무리됐다. 웃음이 나왔다. 울다가 웃었다 우리는.
사랑의 완성이 꼭 결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희의 곁에 좋은 사람이 생겨서 덩달아 행복해졌다. 이젠 연애상담 전화는 안 올 테니. (나도 연애 좀 하자)
건 희의 첫 번째 남친 건은 팜므파탈 여친을 만나 된통 당하고는 잠시 회개하는 듯 보였으나 얼마 못 가 바람둥이로 돌아왔다. 그는 여자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많았다.
범 희의 편지에 답장이 없어 군화를 거꾸로 신은 줄 알았던 범은 사실은 최전방에 차출되어 편지를 쓸 시간이 없었던 것이었다. 범의 군생활은 생각보다 더 서글펐다. 범은 제대 후 희와 만나 회포를 풀었고, 지금은 결혼해 자신과 꼭 닮은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혁 돈을 갖고 튀었던 혁은 선배가 운영하던 망해가던 라이브클럽을 살리기 위해 그 돈을 썼다. 그는 후에 한 연예기획사와 계약했고, 받은 계약금으로 희의 돈을 갚았다.
이대리 이대리는 희와 헤어지고 얼마 못 가 볼링동호회 여친과도 헤어졌다. 그는 한동안 희를 잊지 못해 새벽마다 희에게 진상 문자를 보냈다.
이 남자는 찐이라는 생각이 들어 석과 결혼을 결심했다던 희에게 나는 말했다.
"전 남친들은 찐이 아니라 찐따긴 했지."
희는 나의 실없는 개그가 익숙한 듯 웃음기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도 누군가에겐 찐이 되겠지."
희는 전 남친들에 대한 어떤 원망도 남아있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 덕분에 석을 만났다며 고맙다고 했다. 나는 희가 좀 존경스러워졌다. 짜식 언제 이렇게 컸대, 싶었다. 내가 키운 건 아니었지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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