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 걸음(2)
대짝이의 말에 나는 자세히 바닥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 보던 글자가 아니다. 처음 보는 글이었다. 그런데 읽을 수 있었다.
“여기... 백 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는 작은 시장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주변지역에서 농사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물물교환을 시작했다. 곧 이곳엔 장터가 들어섰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작은 상점을 열었다.”
“우... 와... 정말... 그렇... 게 써... 있어...?”
나는 어떻게 이 글을 아는 걸까? 생각해보니 내가 읽은 책 중에 이런 고대어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서를 많이 보아서 알고 있는 건가? 고대어를 알고 있는 로봇이라니 박사님이 의도한 일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멋져진 것 같았다. 나는 신이 나서 바닥에 쓰여있는 글을 마저 읽었다.
“최초의 상점 열여덟 개를 기록한다. 이 상점들은 도시의 상징이 되어서......, 잠깐, 이 가게 들어봤어.”
나는 몇몇 상점들 속에서 낯익은 이름을 찾아냈다.
“장, 아... 어디서... 봤지?”
기억력 하면 나다. 생각해내라. 생각해내라. 생각... 났다.
“볼트! 박사님이 사용하는 볼트에 새겨진 글씨야. 여기서 사 왔나 봐.”
광장의 글을 생각하며 ‘장’이라는 간판의 가게를 찾았다. 도시 전부를 뒤질 수도 있다고 각오했는데, 광장에서 아주 가까이 있었다. 간판도 간판이지만, 집에서 많이 보았던 물건들이 쌓여있어서 한눈에 찾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는 작고 초라했다. 100년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연하겠지.
박사님의 성격상 도시는 지나쳐도 이런 가게는 꼭 들렀을 거다. 가게 앞에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을 보니 더 확신이 들었다.
“저기요, 계세요?”
“누구냐?”
컴컴한 가게에서 나타난 주인은 척 박사님만큼 나이가 있는 할아버지였다. 흰머리와 수염이 나이를 말해주고 있었지만, 젊은 사람보다 더 건장한 덩치를 갖고 있었다.
“척을 찾아서 왔다고? 그럼 네가 깡통이냐?”
“네.”
“그 녀석은 집에만 콕 박혀서 허약하고 힘도 없어 뵈더구먼, 로봇도 지랑 똑같네. 이 녀석은 뭐냐? 너도 척이 키우는 로봇이냐?”
박사님과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격한 감동이 밀려왔지만, 장 할아버지의 말투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의가 없었다. 하지만 난 교양 있는 로봇으로써 흥분하지 않기로 했다.
“대짝이는 아니에요. 박사님이 요즘 여기 왔었나요? 혹시 아직도 이곳에 있나요?”
“지금 여기 없어.”
장 할아버지는 턱수염을 손으로 빗질하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며칠 전에 주문을 하고는 잠깐 다녀온다고 요 앞 마을에 갔어.”
“앞 마을이요?”
“응.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아주 작은 마을이 있는데, 몇 년 전에 이사를 온 부부가 천문대를 짓는다는 말을 듣고 냉큼 도와주겠다고 따라갔다고.”
“처... 언... 문... 대?”
“며칠이면 된다고 자기가 꼭 도와줘야 한다나. 그냥 구경하고 싶은 게 분명하지만, 알다시피 누가 말리겠냐? 그런데 왜 안 오는 거야? 올 때가 한참 지났는데...”
“그곳은 먼가요”
“이틀? 아니다 너희들은 하루면 갔다 올 수 있는 거리야. 조금 산이 높아서 그렇지. 멀진 않아.”
턱수염에서 손을 떼고 먼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지? 저기 꼭대기야.”
하늘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뾰족한 산이었다. 이곳에서도 한눈에 보이니 진짜 멀진 않겠지만, 가까워서 그런지 더 높아 보였다.
“너희들이 가서 좀 그 노인네를 좀 데리고 와라. 저기 있는 것들 보여? 이걸 구해달라고 난리를 쳐놓고 말이야. 저것들 때문에 장사가 안돼.”
말은 투덜거렸지만 장 할아버지도 돌아오지 않는 박사님이 걱정되는 눈치였다. 가게를 비우고 찾아 나설 수 없어서 답답했겠지. 우리를 보고 은근히 반가워하며 등을 떠밀었다.
덕분에 우리는 도시에 도착한지 몇 시간만에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장 할아버지의 말처럼 문제가 많은 박사님이다. 그래도 소식을 듣게 되어서 나도 대짝이도 훨씬 표정이 밝아졌다. 이제 다들 알겠지만 눈이 조금 커진 것뿐이다. 다른 걸 기대하지 말아라.
“바악사... 님, 괘... 찮게... 엤지?”
“당연하지. 어서 가보자.”
< 다음 편의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