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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Oct 07. 2022

영생과 관련된 영화 리스트

<존 말코비치> 속 영생을 향한 욕구를 따라서.




   영생에 대한 욕구는 죽음이라는 미지의 상태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 고대인들은 사후세계와 종교, 혹은 신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종교의식이나 장례를 치룸으로써, 혹은 신비한 물체를 얻음으로써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는 영생을 얻기 위한 여정을 그린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죽은 자를 영원한 삶으로 이끄는 절차를 담은 이집트의 <사자의 서>, 그리고 불로불사를 얻기 위해 불로초를 찾으려 했던 진시황의 노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근간에는 심장이 모든 행동과 생각의 중심이라는 관점이 숨어있다. 그러나 점차 뇌의 비밀이 밝혀지며 심장 중심 관점에서 뇌 중심 관점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뇌의 기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7세기, 근대적 과학이 탄생하면서 영생을 얻기 위한 노력은 신비의 영역에서 과학과 의학의 영역으로 넘어오기 시작했으며 이제 사람들은 뇌를 기계장치에 비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수학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뇌의 신경 구조에 알고리즘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는 도식 법이며, 이 도식법은 현재까지도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런 도식에 기초해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이 개발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어느 정도의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람들은 ‘어떤 장치나 다른 뇌에 우리 마음을 업로드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를 실현화 하려는 기업이 바로 현재의 ‘뉴럴링크’이다. 또한, 의학에 있어서도 영생을 풀려는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뇌 이식 수술’ 이다. 이전에 영생을 신비의 힘으로 풀고자 했던 것에 비하면 죽음을 향한 인간의 도전은 굉장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렇듯, 영생에 대한 관심과 도전, 그리고 여러 논의들이 계속되어 온 만큼 영생을 소재로 다룬 영화나 문학 작품들이 많다. 특히, 근대 이후에 뇌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과학윤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보편적 소재로서 다뤄지고 있다. 다음에서는 영생에 관한 여러 영화들 중 몇 편을 소개하면서 영생을 향한 도전들이 영화 내에서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그리고 거기에 얽힌 윤리적인 문제들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1.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2001)


   해리포터 시리즈에는 꾸준히 영생을 갈구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메인 빌런 볼드모트로 시리즈의 시작을 여는 ‘마법사의 돌’ 에서는 영생에 대한 그의 욕망이 직접적 매개체를 통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화의 메인 소재인 ‘마법사의 돌’은 영생의 약을 제조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당시 실질적인 육체도 없는 볼드모트는, 이 돌을 얻어 자신의 힘을 되찾고자 한다.

   볼드모트에게 영생은 권력과 동일하게 여겨진다. 그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권력을 가져 마법사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그것을 위해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법사의 돌’에서는 (자의인지 강제인지 알 수 없지만) 퀴렐 교수의 몸에 기생하며 호그와트에 테러를 하기도 하고, 절도나 살해 협박 등은 예사로 저지른다.

   판타지 장르의 영화인만큼 영생을 얻는 수단으로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힘을 가진 물체가 사용된다. 그러나 그것을 얻고자 하는 볼드모트의 모습만큼은 현실의 모습과 크게 다른 점이 있는지 되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생을 권력으로 치환한다면, 수많은 역사가 권력을 얻기 위해 어떤 것도 불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2. 트랜센던스 (2014)


   반 과학 단체에 의해 목숨을 잃은 연인 윌을 되살리기 위해, 에블린은 윌의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 시킨다. 이렇게 살아난 윌은 초반에는 꽤나 도움이 되는 듯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안 좋은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AI가 된 이후, 그의 목적 의식은 보다 과격해지고, 그의 인격은 희미해진다.

   ‘트랜센던스’에 등장하는 영생의 방식은 과학기술의 발전 이전에 어쩔 수 없이 판타지에 의지하던 시기를 벗어난, 나름의 현대적인 시도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제시하는대로, 데이터화 된 인격이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결론부에서 영화는 결국 인격의 AI화를 포기하고 오프라인 상태로 돌아가며, 영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가 제시한 새로운 논의는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영생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형체와 정신이 유지되지 않는 채로 살아가는 것도 또한 영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기존에 알던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기존 삶의 연장이라고 봐야 하는가,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봐야 하는가? 그렇다면 다른 존재가 된 나는 기존의 나와 동일한 존재라고 볼 수 있는가?




3. 블랙미러 시즌3; 센주니페로 (2016)


   시한부 선고를 받은 켈리와 사지마비 상태인 요키가 ‘센주니페로’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 여기서 ‘센주니페로’는 TCKR시스템즈가 만든 곳으로 기억을 데이터화하여 이 곳에 접속한 사람들은 이 공간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기억을 데이터화 함으로써 사람들은 육체적 문제들을 극복하고 제약 없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식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이곳으로 그냥 넘어가려는 사람들을 막고자 국가에서는 가족들의 동의 같은 사회적 제약을 걸어놓고 통제한다. 그러나 마치 유토피아 같은 이 곳, ‘센주니페로’를 두고 두 사람 사이 갈등이 시작된다. 요키에게 그곳은 모든 게 진짜이며 영원히 살 수 있는 공간이었고, 켈리에게 그곳은 의미 없는 삶을 영원히 지속하게 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디지털화된 공간에서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 원하는 삶을 원하는 만큼 영위하는 것이 과연 유토피아인지 혹은 단순히 시간적인 제약만을 없애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진실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4. 겟아웃 (2017)


   흑인인 한 남성이 백인인 여자친구 집에 초대 받아 놀러가게 되고, 그곳에서 이상함을 느낀다. 알고보니 여자친구의 가족들은 뇌 이식 수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뇌 이식 수술은 기존의 육체 속 뇌를 꺼내 다른 육체에 접합하는 것으로, 수술이 마무리 되면 기존의 육체에 있던 자아는 그저 관람만 할 수 있으며 접합된 뇌의 주인이 주체권을 가져가게 된다. 이 영화에서 영생은 이렇게 뇌이식 수술이라는 의학적 방법을 통해 실현된다. 실제로 2017년, 이탈리아의 세르지오 카나베로 교수가 제한적이나마 뇌이식 수술에 성공했듯 영화가 그린 영생의 방식은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술의 아이디어 속엔 뇌 안에 의식이 부유하고 있어서 뇌와 함께 의식도 교체될 수 있다는 관점과 우리 감정과 생각이 뇌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이 숨어있다. 하지만 우린 아직 의식의 비밀을 풀지 못했기에 이 기본 전제들이 사실인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뇌 이식을 이야기하기 전에 사람의 의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 뇌 이식 수술은 소수의 특권층들만 누리는 것으로 그려지듯, 우리의 영생이 기득권층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봐야한다.




5. 서복 (2021)


   영화에는 두 사람이 나온다. 교모세포종이라는 병으로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을 남겨둔 기헌과 줄기세포 복제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복제인간 서복. 아, 그러니 두 ‘사람’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토마토 줄기에서 감자 뿌리가 자란다면 그건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으니까. 서복의 존재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서복의 골수를 채취해 인간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인간이 병으로 죽지 않기 위해, 서복은 실험실에 갇혀 고통스러운 주사를 맞고 또 맞는다. 서복의 골수가 인간의 병을 고칠 치료제라는 걸 안 기헌은 그래서 서복의 이동을 책임져달라는 임무를 수락한다. 죽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함께하게 된 죽고 싶지 않은 기헌과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 서복은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에 휘말려 결과적으로 서복을 ‘제거’하려는 ‘회사’를 피해 도망치게 된다. 그리고 도망침의 끝에서 그들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을 맞닥뜨린다. 영화는 상영 시간 내내 관객에게 물음을 던진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째서 영생을 욕망하는가. 인간은 살고 싶은 걸까 죽음이 두려운 걸까. 죽음이 두려운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누군가-그 누군가가 사람이 아닐지라도- 고통받는 것은 묵인될 수 있는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입안이 까끌거렸다. 서복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더라도 기헌은 서복을 지키려고 했을지가 문득 궁금해져 입안이 더욱 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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