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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Oct 07. 2022

존 말코비치 되기 비평문2_이 영화에서는 냄새가 납니다

이 영화에서는 냄새가 납니다.     


레미   




       

   기상 시간 직전, 불편하게 잠자리를 붙잡고 꾸는 얕은 꿈의 잔여감을 아는가? 온전히 잠에 든 것도 아닌 그렇다고 의식이 또렷한 것도 아닌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꾸는 꿈은 선명한 찝찝함을 남긴다. 이 영화는 마치 선잠의 꿈을 옮겨놓은 듯한 묘사로 피로와 불쾌함을 선사한다. 대게 그런 꿈들은 뒤죽박죽이다. 어떤 욕망이 투영된 상황에서 시공간이 뒤틀리고 무엇인가에 쫓긴다. 또는 무언가를 쫓는다. 만약 그 과정이 ‘이름’을 빼앗고 지키기 위한 긴 혈투라면 어느 쪽이 당신을 더 불쾌하게 만드는가? 이름을 빼앗긴다는 공포, 혹은 이름을 갈취하려는 광기.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크레이그와 말코비치.    

 

   영화는 두 이름을 중심으로 한다. 희미한 존재감으로 방황하던 크레이그는 누구나 주목하는 배우의 삶을 사는 말코비치의 이름을 탐내며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다. 크레이그는 새로 취직한 회사에서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하고 그의 삶을 엿본다. 처음에는 그의 생활을 지켜보는데 그치지만 나아가 그의 삶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히며 말코비치를 조종하기에 이른다. 말코비치의 몸으로 들어간 크레이그는 말코비치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한다. 포털 이용료를 받아 수익을 내고, 말코비치의 몸으로 좋아하는 여성의 관심을 받고, 심지어는 외면받던 직업의 정점에 서게 된다. 가장 큰 성취는 예술가로서의 성공이다. 크레이그는 꼭두각시 조종사였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꼭두각시 조종사로 성공할 수 없었지만 말코비치의 이름으로 그는 꼭두각시 공연의 새로운 지평을 연 저명한 예술가가 된다.

   이를 뿌듯한 성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욕망의 성취를 위해 타인의 이름을 빼앗고 조종하는 것의 불쾌감, 동시에 타자에게 잠식당하는 공포. 즉, 이름을 빼앗는 것과 빼앗기는 것의 불쾌함은 존재의 위협을 경고한다. 이는 말코비치가 된 크레이그의 성공이 악취를 풍기는 이유이다.          




   말코비치의 이름을 강탈하는 크레이그의 행동은 타인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동시에 본인의 본래 이름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크레이그’라는 이름의 행방은 불쾌함을 가중시킨다. 우리는 그 이름의 행방을 알 수 없다. 이름의 주체가 자신의 이름을 놓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놓아버리는 선택을 함으로써 크레이그는 완벽한 위선자가 되었다. 영화가 결말을 향할수록 진동하는 악취는 본래의 말코비치가 크레이그에 저항하는 모습을 통해 증폭된다. 결국 말코비치는 꼭두각시 혹은 숙주로 전락했다. 이름의 주인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주체권을 빼앗기는 상황은 크레이그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진다. ‘말코비치’라는 이름을 독차지하기 위한 그의 집착은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이다. 선택적 합리화로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워버린 크레이그는 ‘말코비치 ≠ 크레이그’라는 불일치를 극대화하며 악취의 정점에 선다.     



      

   다시 오프닝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크레이그를 원망과 공포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꼭두각시 인형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말코비치의 몸에서 빠져나온 크레이그를 보자. 포털에서 빠져나온 크레이그는 마치 배변활동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온몸이 알 수 없는 액체로 젖어 잔여물들이 들러붙은 채로 냄새나는 저수지에 배출되기 때문이다. 오물에 뒤덮여 내동댕이쳐진 크레이그를 통해 보는 이들은 시각적 악취를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자신을 영영 잃어버린 크레이그의 최후는 말한다. 자신의 이름을 배반하는 것은 영원한 천국이 아닌 영원한 감옥이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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