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아줘서 고마워
어렸을 때 참 인형을 좋아했다. 보들보들한 곰인형부터 예쁘고 늘씬한 바비인형까지. 인형에 여러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어주는 건 기본이었다. 각각 인형마다 이름과 인격을 부여하며 몇 시간이고 놀아도 지겹지 않더랬다. 어쩌다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오면 함께 인형놀이는 필수코스였고, 내게 얼마나 예쁜 인형들이 있는지 목청높이며 자랑하기 바빴다. 혹여나 새로운 인형을 산 다음날에는 꼭 친구와 인형놀이를 해야 직성에 풀렸다. 엄마랑 목욕탕에 갈 때도 꼭 바비 인형 하나와 함께 출발했다. 인형 놀이할 때는 법칙이 있었다. 인형들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인형이 주인공이었고 조금 안 좋아하는 인형은 내 인형이지만 악역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 인형들은 주인공이든 악역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며 어느새 인형보다는 다른 것이 좋아졌고, 더 이상 인형놀이를 하지 않았다. 몇 번의 이사와 대청소를 반복한 끝에 내가 좋아했던 바비인형들은 모두 사라졌다. 나의 인형들도 버려질 때 토이스토리 장난감들과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뒤늦게 토이스토리를 보며 괜스레 가슴 한구석이 쓰렸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미안....)
지금 내 방에는 총 두 개의 인형이 있다. 한 개는 초등학생 때 오빠에게 사달라고 졸라 겨우 받았던 큰 리락쿠마 인형이고(라떼는 리락쿠마가 대세였다), 다른 하나는 너무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거라 출처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옛날 사진을 찾다가 발견한 인형과 나의 사진. 아마 5살 때부터 나는 이 아이와 함께 자랐다. 한때 우리 집보다 인형 하우스를 소중히 여겼던 나는 인형은 '크고 공간을 차지하는 물건'이라 생각하는 무심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용케 살아남아줘서, 나와 함께 살아줘서 고마워. 너네만큼은 버리지 않을게. 아. 미니멀리스트가 되긴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