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질문] 왜 살아요?

질문

by 오 영택

Ch 3. 질문

1) 왜 살아요?

2) 어떻게 살 것인가?

3)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4)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5)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1) 왜 살아요?

함께 4년가량 독서모임을 한 동생에게 “오빠는 왜 살아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말 그대로 날 것의 질문이었다. 지하철에서 받은 질문치고 묵직했다. 진지한 질문에 걸맞게 답했던 기억은 있지만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질문을 받은 이후, 며칠간 생각해봤다. “어떤 이유에서 이 질문을 했을까?”, “어떤 고민에서 이 질문이 나왔을까?”부터 “왜 살아야지?”라고 스스로의 인생에 반문했던 과거도 떠올랐다.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늘 학구열이 있던 친구여서 아무래도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과 이유를 고심하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뿐이다.


“왜 살아요?”라는 날것의 질문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삶의 이유가 있는가?”라고 바꿀 수 있다. 인생의 목적과 이유를 묻는 질문이다. 살아가면서 스스로 묻게 되는 대표적인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마음이 힘들 때,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를 느낄 때, 방황하는 것 같다고 느낄 때 등 방향을 설정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 때 떠오르는 질문이다.


중요한 질문인 만큼 단번에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단번에 답할 수 없다는 것은 지나온 시간에 대한 돌아봄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동안 무엇을 추구해왔는지, 걸어온 길에 만족하는지, 어떤 일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삶의 목적과 이유는 경험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상황이 변하고, 누군가를 만나느냐에 따라 생각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생각의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를 불러오고, 삶의 양식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늘 궁금해진다. 내면의 힘이 느껴지는 사람, 늘 활력적인 사람, 같은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 배울만한 사람의 모습을 보면 호기심이 생긴다.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리고 어떤 희망을 바라보고 있는지와 같은 다양한 얘기를 통해 삶의 모습을 추측하며 해석해볼 따름이다.




정체성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이 말은 삶의 '이유'를 아는 것의 힘을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히 “행복하기 위해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와 같은 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삶의 이유라고 말하기에는 추상적이다. 각자가 정의하기에 달라지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수치는 존재할지언정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하기 위해서'라는 표현은 자신의 방향과 목표를 나타낸다. 행동의 이유는 될 수 있지만 삶의 이유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삶의 이유는 특정한 표현으로 담아낼 수 없다. 삶의 목적과 이유는 정체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정체성은 “나는 학생이다”, “나는 직장인이다”, “나는 회계사다”, “나는 부모다” 와 같은 사회적 역할이나 지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진정한 정체성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답이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어떤 순간 나다움이 잘 드러나는지 등에 관한 내용이다. 이는 외부에 의해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서 가장 나다움을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새로운 도전을 할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이런 발견들은 한 두번만에 드러나지 않는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여러 실패와 성공을 거치며, 그리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추적이 필요하다. 자신의 스토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리해야 한다. 인생은 어떤 직업이나 상태와 같이 몇 개의 단어들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문장의 연속이다.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이유와 상황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결과를 마주한다. 이유와 결과가 존재하기에, 결국 인생은 문장으로 귀결된다. 깔끔한 문장이든, 호흡이 긴 문장이든 상관없다. 그 가운데 자신만의 스토리가 존재하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삶의 문장은 대필이 불가능하다. 대신 써내려 갈 수는 있지만 온전한 표현을 담아낼 수 없다. 자신만의 감성, 기억, 아픔, 교훈 등은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삶에 대해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직접 살아간 사람의 순간을 온전히 해석하기는 불가능하다. 저자임에도 대학수학능력 시험에 등장하는 문제를 맞추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체성은 지문과 같아서 비슷할 수 있어도 미세하게 다르다. 비슷한 표현과 문장구조, 수식어들이 나타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다르다. 생성형 AI가 만들어낸 작품이나 글처럼 비슷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고유한 의도와 목적은 자신만이 안다. 그 고유한 것으로 무엇을 만들어나가는지에 따라 점차 달라진다. 많은 대가들도 처음에는 모방을 통해 숙련도를 높여나간다. 하지만 자신의 관심분야를 발견하고 공부하며 다른 묘사를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모방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자신만의 시선으로 사물을 그리며 추상화시켜나간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에 대해 사람들은 묘사를 위해 사용한 기법이나 의도를 다양하게 추측한다. 오직 작가만이 알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처럼 정체성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역할 모델을 따라, 혹은 존경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며 모방하기 시작한다. 같은 작가나 인물을 좋아해보기도 하고, 그가 말한 내용을 마음 속에 간직하며 재사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모습을 따라해보기도 하고, 어투나 작은 행동까지도 모방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만의 습관과 사고방식과 접목시키며 고유한 행동으로 나타난다. 경험하고 마주한 상황들을 통해 생각을 정립하면서 흐릿하게나마 고유한 정체성이 형성되어간다.




묻다

질문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찾듯이, 인생의 질문에 대한 탐색과 발견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계속 물어야 한다. 질문은 직면하게 만들기에, 이를 감내할 용기가 필요하다. 정확히는 답을 찾기까지 찾아올 귀찮음과 답답함을 인내할 용기가 필요하다. 피하고 싶고, 미뤄두고 싶은 마음이 찾아옴에도 거절하고 질문을 먼저 맞이할 단호함이 필요하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지인과의 일정을 미루거나 약속을 거절하는 것처럼 말이다. 찾아온 질문을 외면하고 마음에 묻으면 훗날 다시 찾아와 당시 만남을 거부한 것에 대해 질타할 것이다.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은 어렵다. 심지어는 무섭기까지 하다. '왜' 라는 질문 자체가 구체적인 이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두루뭉슬하게 답하기에는 스스로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또 다른 질문이 뒤를 잇기 때문이다. '왜?'라는 질문은 또 다른 '왜?'를 데려온다. 한 번의 답변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체적인 이유를 요구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사례나 실현 가능성과 실현을 위한 방안 등을 요구한다. '왜?'라는 질문은 설득을 요구하는 논리성을 요구하는 질문 형태인 까닭이다.


또한 “왜?”라는 질문을 마주하면 추궁받는 느낌이 든다. “왜 그렇게 했어?”, “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해?” 같은 질문들은 행동에 대한 이유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설명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마주하는 순간, 답변이 변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은 그저 이유를 요구할 뿐이다. 단지 일상에서 추궁과 만족스럽지 않은 행동이나 결과를 물을 때 사용해왔을 뿐이다. 부정적인 어조나 부족함을 짚어낼 때 “왜?”라는 질문이 자주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왜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 “왜?”의 모습으로 나타난 질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덤덤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마주하면 된다. 질문을 마주한 후에는 탐색의 시간이 필요하다. 답을 찾기 위해 기억을 뒤적이고, 경험들을 소환하고, 재발견한 깨달음이나 자신만의 이유를 정리하며 조립해나가면 된다.


이것이 어렵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좋다. 참고하기 위해서는 물어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묻기 어려운 질문인 것은 사실이다. 또한 낯가지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밥 먹었어?”, “잘 지내?”와 같은 일상적이고 형식적인 게 아닌 만큼, 질문하는 것조차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심지어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질문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정체성이나 이유, 목적을 찾기 위해서라면 감수할 만하다. 상대방의 이유와 목적, 진정성은 하나의 울림으로 작용하기에 가치있다. 살면서 누군가의 말에 힘을 얻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는 것처럼 마음에 여운이 남는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또한 이 과정은 자신에게 묻는 행위이기도 하다. 상대에게 질문하지만 그 질문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질문에 직면하기 위한 용기가 필요하다면,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음으로써 질문에 친숙해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당사자의 이야기 속에서 건져올릴 도구들로 참고자료를 쌓아가면 된다. 질문하고 주고받는 대화만으로도 질문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게 되고,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게 되면서 친숙해지기 때문이다.


인생은 주관식이기에 객관식처럼 정답을 고를 수 없다. 주어진 보기를 선택해도 정답이 곧바로 판가름나지 않는다. 누군가 조언을 해주거나 일부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결국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양육해준 사람도, 가르침을 준 사람도, 가까운 친구도, 그 어떤 누구도 삶의 무게를 대신 짊어질 수 없다. 걱정과 조언을 해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인생을 나누며 어떻게 지내는지 교류를 이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매일, 매순간을 마주하는 자신만큼 깊은 관심을 지속하기는 어렵다. 그때마다 도와줄 수도 없다. 결국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 이는 스스로를 믿어주고 결정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도 인생을 대신 살아가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본인만의 방법으로 마주하며 직면해야 한다. 자신의 방향성과 의미를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체성을 묘사할 수 있다. 진정성은 삶의 목적과 이유, 정체성에서 드러난다. 이에 따라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지를 선택하며 결정해 나간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관계나 삶의 양식에 변화가 일어난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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