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기억과 기록] 신뢰받음

기억과 기록

by 오 영택

5) 신뢰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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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17년 12월 12일에 군입대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토종주 라이딩을 하며 이상이 생겼다. 무거운 가방과 느린 속도탓이었다. 손목터널증후군이 생겨 3개월 가량 검지와 중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입영연기가 되어 18년 6월 태풍부대 운전병으로 입대했다. 그러나 입대 후 건강상태를 체크하던 중 흉부 X-ray를 통해 척추측만증이 판정을 받아 귀가조치 대상자가 되었다. 진행하고 있던 모임들을 다 정리하고 입대한 터라 중대장 면담을 통해 군복무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귀가조치는 변함없었다. 안전상의 이유와 책임소지가 다분해질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귀가조치는 번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신체검사를 하니 4급으로 판정받아 군복무를 사회복무요원으로 대신하게 됐다.


그렇게 훈련소를 8월 16일에 입소하고 한 달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9월에 서대문형무소로 배정받았다. 이곳은 일본의 식민통치 당시 독립운동가를 투옥하고 고문했던 역사를 보존하고 있는 장소였다. 많은 분들이 순국한 장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독립 이후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갇혀 있던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우리나라의 민족적*역사적 아픔의 흔적들이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관람객이 방문했다. 수도권뿐만 아니라 지방에 있는 학교들에서도 수학여행 차원에서 많이 왔다. 복무지에서의 첫 해 19년은 독립운동 100주년이었다. 무려 10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했다. 그만큼 관리하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이, 역사적 공간에 대한 교육차원에서 오는 학생들이 주를 이뤘다. 인근에는 안산과 인왕산이 있어 등산객분들도 많이 찾았다. 여러 단체를 통해 어르신들도 많이 방문했다.


특히 수학여행 시즌에는 개관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분주했다. 인원제한을 위해 줄을 세우고, 도로변에 나가 버스를 통제하고, 원활한 관람을 위해 건물마다 인원을 제한하고, 문의응대 등 다양한 업무들이 존재했다. 매표부터 쓰레기 줍기, 뛰어다니는 학생들 주의 및 통제, 동선 순찰, 전화 안내 등 다채로운 업무를 했다. 또한 여름철에는 잡초도 뽑고, 삼일절이나 광복절을 앞두고는 거대한 태극기를 교체하는 작업을 했다.




태도

27살, 상대적으로 많은 나이에 근무지에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힘썼다. 서대문형무소에 배정받았던 18년 9월에는 이미 31명의 사회복무요원들이 있었다. 늦은 나이에 들어온 만큼,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또한 교회에서 리더로서 가르치고, 별도로 운영했던 독서모임에서 태도를 강조하며 얘기했던 말들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우스갯소리로 사회복무요원들 사이에 도는 말들이 있었다. 그 중 으뜸은 '무적의 3단 콤보'라 불리는 “왜요?”, “제가요?”, “저 공익인데요?”였다. 암암리에 돌고 있는 답변의 정석과도 같았다. 직원분들이 업무 지시를 하면 저렇게 답하면 된다는 말이 존재했다. 이렇게 하면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게 공공연한 말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깊었다. 지금도 유효할 무적의 3단 콤보라고 생각한다. 업무지시에 대해 저렇게 반응한다면 상대하고 싶지 않을 듯하다. 화도 나겠지만 차라리 상종하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판단이 들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렇게 실제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마인드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징계받지 않을 정도로만 행동하고 시늉하는 인원이 대다수였다. 지시한 일만 하고 끝내는 모습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구석진 자리에서 휴대폰을 하거나 편한 업무만 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모습이 사회복무요원들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런 모습의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다만, 스스로 “공익한테 뭘 바라냐”, “공익인데 뭘”, “돈도 적게 받는 데 열심히 할 필요 없다” 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자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분위기로 자리잡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군대처럼 먼저 복무한 사람에게 대우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하는 친구들에게 “뭘 그렇게까지 하냐”는 말들을 심심찮게 했다. 때로는 조롱이었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나에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회복무요원들 중에서는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태도에 대해 얘기하며 강조했던 모습대로 시간을 채워나갈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덕분에 비슷한 태도를 지닌 친구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몇몇 친구들과 많은 일을 하며 우정과 시간을 쌓을 수 있었다. 덕분에 성실한 사람들은 어딜가든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요컨대 태도는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선택이다. 또한 단시간에 형성되지 않는다. 태도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지나온 세월에 대한 흔적을 반영한다. 나이테는 나무가 겪은 환경과 성장의 과정이 반영된 결과이다. 비가 많았던 해에는 넓고 선명한 나이테가 남고, 가뭄이 들었던 해에는 촘촘하고 얇은 나이테가 새겨진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면 그 흔적이 남고, 병충해나 상처를 입은 해에는 불규칙한 모양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모든 흔적들이 남아있어 나무의 생애를 이루며 단단하고 거대한 줄기를 이룬다.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 지내온 환경과 지난 경험에 따라 자신만의 믿음체계를 형성한다. 이처럼 태도는 삶의 나이테와 같다.




자율성

마음 맞는 동료와 함께 일하는 것은 축복이자 하나의 즐거움이다. 이는 살아온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고 얘기해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또 그들과의 대화에서 삶의 방식에 대한 공통점을 발견하며 은연중에 위로와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해나갔다. 그러면서 잘하는 친구들이나 직원분들의 모습을 모방하며 더 능숙해지기 위해 애썼다. 야간근무도 자원하여 많은 업무를 익혀나갔다. 업무 배정은 주기마다 바뀌는 터라 모든 일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6개월을 채웠을 무렵부터는 능숙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인사 잘하고, 나서서 하니 직원분들에게도 신뢰를 받았다.


어딜가든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일이 몰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업무량이 늘어났다. 찾는 직원분들이 많아졌다. 믿고 맡기시는 분들도 있었고, 떠넘기는 분도 계셨다. 2인 1조로 근무할 때면 어떤 분은 자신의 업무를 넘기고, 쉬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업무를 마쳤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모두가 함께 배정되지 않기를 바랐다. 재밌는 점은 그렇게 보고해도 같은 직원분들조차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자신의 이름만 보고서에 작성할 뿐이었다. 어느 집단에서나 이런 행태는 존재한다.


이러나저러나 알아주는 분들이 있기에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반면에 휴대폰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수동적으로 맡은 업무만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틀렸다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을 빨리 끝내면, 또 다른 일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때로는 현명해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열심히 했던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은 돈을 받으면서 열심히 하면 호구'라는 농담섞인 말들이 많지만 신경쓸 필요가 없다. 어떤 태도를 취하든 평가는 항상 뒤따른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할 따름이다. 누군가는 받은 만큼 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바빠게 일해야 시간이 빨리 간다고 생각한다. 또 누군가는 눈치껏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결국 각자의 경험에 따라 생각과 입장이 달라지고, 신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 또한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기에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의 편함을 위해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피해를 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자신이 피해받으면 마음이 좋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7개월차가 되면서부터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동시에 다른 인원들의 일처리를 확인하고 바쁜 곳을 지원하는 역할이 되었다. 열심히 하는 만큼 많은 모범상과 많은 휴가가 뒤따랐다. 휴가도 쌓여갔지만, 신뢰 역시 쌓이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자산이었다. 신뢰를 얻은 덕분에 많은 자율성을 누릴 수 있었다.


자율성 역시 자유와 마찬가지로 제약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행동이 다르다. 자유(自由)는 외부의 어떤 것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면, 자율(自律)은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통제하는 것이다. 자유가 타인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라면, 자율은 스스로 세운 약속을 지키려는 행동이다. 한 집단의 구성원이라면 내부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규칙을 어기면 불이익이 뒤따른다. 반면 자율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모습이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기에, 누군가 지시했기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감시자와 관리자가 되어 필요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자유와 마찬가지로 자율성에도 책임이 뒤따른다. 그러나 마음은 자율성이 좀 더 편하다. 자율성은 자신의 원칙과 신념으로 움직이기에 내적동기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유 역시 분명하다. 그렇기에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이유와 함께 필요한 업무를 찾아나선다. 잠깐의 편함을 위해 눈치나 분위기 살피며 마음 졸이는 것보다는 찾아나서는 게 마음 편하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도 몰릴 것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는 신뢰와 능숙해짐을 몸소 느낄 수 있다. 신뢰받음과 스스로 느끼는 효능감은 바꿀 수 없는 자산이다. 이 사실을 떠올리며 기꺼이 자율성을 선택해보면 어떨까.




진정한 신뢰

신뢰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믿는다”고 말해도 신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눈에 보여야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정한 신뢰는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약속을 이행했다고 믿는 것이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충실하게 약속을 이행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확신하는 것이다. 결국 신뢰는 믿음의 영역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 함부로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접하며 살아간다. 또한 쉽게 믿는 사람에게는 “순진하다”고 조롱하듯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누군가를 쉽게 믿으면 안 된다는 점을 사실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뉴스만 봐도, 전세사기나 보이스피싱, 지인들로부터 당하는 폭력이나 사기, 뒷담화 등 여러 모양으로 조심해야 하는 이유들이 많다.


이런 현실 때문일까. 보이는 것들로 믿음의 정도를 결정한다. 신뢰의 여부가 계약서나 성과나 명성에 좌우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이 역시 불안정하다. 예를 들어, 예외사항이 아주 작은 글씨로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어 정작 필요할 때 제대로 혜택받지 못하는 보험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월 1000만원 또는 연봉 10억을 벌었다며 부를 과시하며 좋은 집이나 차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유튜버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의 실상은 허위광고와 조작한 내용으로 콘텐츠와 상품을 팔아 돈을 버는 사기꾼에 불과했음을 목격하기도 한다.


보이는 것으로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로 인해, 점점 신뢰라는 개념이 옅어져 간다. 더 분명한 것을 찾게 되고, 더 확실한 무언가를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보여주며 살아갈 수 없다.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에 대한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검증하고, 시험하고, 기준을 세워야 하는 '불신비용'이 발생한다. 이런 작업은 번거롭고, 일을 처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결국은 번거로움과 값비싼 불신비용보다는 믿는 것으로 회귀하게 된다. 사실 모든 관계는 믿음에 기반한다. 이 믿음은 들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상대방의 말을 믿어야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자신만의 신념과 원칙이 중요하다. 자신의 관점과 경험에 의거해 사람을 평가하고 믿을지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신뢰 관계를 형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분명한 성과와 상대방의 언어와 태도, 즉 인격에 따라 신뢰여부가 판가름난다.


일상에서도 신뢰하고 있는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마음의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신뢰의 한 모습이다. 나를 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기저에 있기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또한, 센스 있게 일 잘하는 사람과 호흡이 잘 맞다고 느끼며 시너지 효과를 경험하는 것도 신뢰에서 기인한 결과이다. 상대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는 믿음과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아도 원활하게 끝마칠 거라는 믿음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신뢰는 단순히 “믿는다”라는 말이 아니라 판단기준과 능력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일을 맡길 때, 인격은 좋은데 업무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다. 사기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있지만 일을 잘 해낼거라고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은 잘하는데 인격적으로 멀리하고 싶은 사람 역시 신뢰할 수 없다. 일은 잘 해낼거라는 믿음은 있지만, 오래 함께 하기에는 머뭇거리게 된다.


신뢰는 총체적인 결과값이다. 성과를 통해 능력에 대한 평가,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발견하는 인격, 그리고 한결같이 보여주는 태도 등을 종합한 값이 신뢰다. 이렇게 형성된 신뢰는 빠른 속도를 보장한다. 약속을 이행할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계약 없이 일을 믿고 맡기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계약을 지속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검증하고 테스트하는 시간을 줄이기에 여러 에너지와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신뢰한다는 것은 얼음장 위를 걷는 것과 같다. 한 번 깨지면 치명적인 위험을 경험할 수도 있다. 또한 주변 사람들마저 사라진다. 반면에 단단한 얼음장은 안전해서 여러 사람이 뛰놀며 즐기는 공간이 된다. 그렇기에 신뢰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부과세가 붙는 불신비용보다 신뢰로 인해 얻게 되는 효과들을 바라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서대문형무소에서의 21개월의 시간을 통해 깨달은 '신뢰받음으로 인한 자율성'은 큰 자산으로 남아 있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한 선택이 조롱받지 않고 배신당하지 않은 기억이 인생의 마중물이 될 거라 생각한다. 어떤 태도로 임할 것인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회고하는 중요한 자료로 삼고 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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