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존재] 자유로운 존재

존재

by 오 영택

# 자유로운 존재

남을 따라하지 말라. 남과 비교하지도 말라.
자신을 믿고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아무도 가지 않은 자기만의 길을 가라.

_찰스 핸디


"Freedom is nor free".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뜻이다. 대가 없는 자유는 없음을 의미하며,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다는 의미이다. 흔히 '자유'하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시선과 비교로부터의 자유, 직장생활로부터 자유,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등 여러 형태의 자유들을 갈망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에리히 프롬은 이런 '~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를 소극적 자유라고 칭했다. 소극적 자유에 대한 갈망은 상황에 순응하는 가운데 도망만을 꿈꾸기 때문이라고 그는 밝혔다. 프롬은 '~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를 향한 자유(freedom to~')로 표현되는 적극적인 자유를 추구하기를 바랐다. 적극적 자유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직시하고 돌파하는 이미지를 내포한다. 소극적 자유가 회피의 이미지라면, 적극적 자유는 저항하는 이미지인 셈이다. 소극적 자유는 개인적인 자유에 머물지만 적극적 자유는 개인을 넘어서는 자유를 꿈꾼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관계에서의 소극적 자유는 자신에게 맞는 사람들하고만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비판하는 사람이나 불편한 사람과는 멀리한다.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마음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자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늘 자신에게 쓴소리를 하거나 불편한 사람을 피해 다닐 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 참 좁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언제 어떻게 연결될지 알 수 없는 게 인간관계이다. 그렇다면 인간관계에서의 적극적 자유는 어떤 모습이 있을까? 여러 모양이 있겠지만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만남들 속에서 결이 다른 사람, 알 수 없지만 느낌이 좋지 않은 사람, 자신과 맞지 않는 소통방식으로 얘기하는 사람 등을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만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봤지만 편한 사람, 알 수 없지만 끌리는 사람, 영감을 주고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도 있고, 반면교사를 삼을 수도 있는 모습들을 통해 자신을 살펴볼 계기가 주어지는 것이다. 관계에서 피하기를 선택하는 것보다 선택하기를 통해 관계에서의 자유를 누려보는 건 어떨까. 구더기가 무서워서 된장을 안 담글 수 없는 노릇 아니던가. 만남들을 통해 성찰과 배움의 과정에서 피하기만 했던 상황을 때로는 직면하는 것으로, 때로는 단절을 결정하는 선택으로 옮겨가 보자.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과 신경쓰며 거슬리는 마음을 꼽씹는 것보다는 한결 나을 것이다. 관계의 결정권은 무엇보다 각자에게 달려 있으니 말이다.


인간관계 외에도 우리 삶의 영역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모습들은 상당히 많다. 경제적 자립을 통한 일터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파이어족, 부모님의 잔소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독립, 규율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독립운동 등 여러 형태가 있다. 저마다의 자유의 이미지를 갖고 그것을 소망하며 꿈꾼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일까? 이미지로써 존재하지만, 정작 자유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은 흐릿할 때가 많다. 이는 꿈을 구체화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유는 '스스로 자(自)'와 '말미암을 유(由)'가 합쳐진 단어이다. 글자 그대로 옮기면,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가 이유이자 원인 혹은 동기가 되는 것이 자유(自由)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자유는 필연적으로 결과가 뒤따르고 책임을 동반한다. 원인이 자신에게 있기에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책임과 자유는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음대로 한다'는 표현은 온전한 자유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뒤따르는 책임과 결과보다는 '마음대로'에 무게가 치우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책임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기도 하다. 누군가를 탓할 필요 없이 자신을 먼저 돌아보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인이자 이유이므로 스스로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가 이유, 그 자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선과 사회적 알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목표를 향해 가는 적극적 자유가 시선과 사회적 알람들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멀어지게 만들어 줄 것이다.


물론 누군가를, 그리고 사회를 탓하면 마음은 편해진다. 실패의 이유들을 열거하며 핑계들을 말할 때는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비교적 책임이 덜한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 단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무엇보다 탓하거나 핑계 삼을수록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본인이 알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와 달리, 스스로가 원인이자 이유임을 인식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를 선물한다. 누군가를 탓했던 과거의 시간과 사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 주어진다. 원망과 후회의 시간이 소망과 기회를 발견하는 시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발견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나간 시간과 다름기에 해석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원인과 이유를 자신에게서 발견하면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탓하고 핑계 삼던 도둑맞은 시간을 돌려받게 된다. 자신만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자유의 출발점은 늘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책임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결과로부터의 회피가 아닌 자신만의 길을 향한 자유를 위한 걸음은 늘 허리를 굽히고 운동화 끈을 묶는 데에서 시작된다. 조지 워싱턴 카버는 이렇게 말했다.

실패하는 사람의 99퍼센트는 변명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자유(自由)해야 자유(free)로울 수 있다. 책임을 각오할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책임(責任)을 풀어보면 어떤 맡겨진 임무(任)에 대해 꾸짖임을 당할 각오(責)를 하는 것이다. 결국 책임을 염두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로운 사람은 책임을 피하지 않기에 더욱 자유해진다. 물론, 모든 상황이 내 탓일 수는 없으나 탓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탓하기보다 통제할 수 있는 상황과 바꿀 수 있는 상황, 그럴 수 없는 상황을 구분하며 책임질 때에만 비로소 나아갈 수 있다. 생각이 주저앉는 순간 자유로울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위해 일하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에게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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