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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쟤와 별 Mar 12. 2022

불안장애가 있습니다

불안장애 생태보고서(1)

당신은 누군가 비상식적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을 때 “정신병 있냐?” 같은 말을 쓴 적 있는가. 나는 있다. 그것도 자주. 당연히 이 말에 묻어나는 비하적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없었으므로 ― 그리고 (멍청한 생각이었지만) “병신이냐?” 보다는 어감이 순해보였으므로 ― 나는 쉽게 써댔다. 그런 내가 정신병자로 4년째 살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에 널리고널린 아이러니 중 하나일 뿐이다.     




     


 때는 바야흐로 벚나무가 꽃망울을 트기도 전에 장범준의 목소리가 온 세상에 휘날리는, 그야말로 푸른 봄 - 이른바 스무 살의 ‘청춘(靑春)’이었다. 도합 이십 년을 기다려 온 방종의 시절을 드디어 맞이한 것이다. 나는 산뜻하고 발랄한 스무 살의 봄을 기대하며 캠퍼스를 쏘다녔다. 

 그러나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인 것처럼, 벚꽃이 필 때쯤 내 삶에서도 시험이 있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찌릿하며 허리와 다리가 저렸다. 원래 허리디스크가 있긴 했지만, 아주 경미한 수준이었으므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자 감각이 조금 무뎌지는 기분이 들었다. 숙취 탓인가? 기분 탓인가? 찜찜했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리디스크 관련 문헌들을 찾아봤고, 마미총 증후군에 대해 알게 되었다.

     

 마미총 증후군이란 10만 명 중 1명꼴로 발생하는 희귀 증상으로, 척추의 신경다발이 손상되어 24시간 내에 빠르게 처치를 받지 않으면 배뇨장애, 성기능 장애, 보행 장애, 감각 이상 등 장애 판정을 받게 되는 질환이다……(출처: 위키피디아)     


 마우스를 잡은 손이 축축해졌다. 자가 검사표를 보며 하나하나 체크했다. 허벅지를 꼬집어도 아프지 않다 (O), 걸을 때마다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O), 아랫배에도 힘을 줄 수가 없다 (O) ……. 임상적 증상으로, 나는 이미 마미총 증후군이었다. 

 패닉 상태로 동네 의원에서 종합 병원을 거쳐 대학 병원까지, 그러니까 보건 행정상 구분하는 1차-2차-3차 병원을 차례대로 순례하며 내 증상의 원인을 찾으려 동분서주했다. 마미총 증후군이 아니길 빌었던 동시에 마미총 증후군이길 빌었다.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2차 병원 의사의 말은 나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흥분하게 했다.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는 비극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소스였다. 오진으로 골든 타임을 놓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던데 이렇게 의료 과실로 인해 장애를 얻게 되고, 휠체어에 타고……. 이쯤 되면 의사가 거의 뭐 루시퍼의 사신처럼 보이곤 한다.

     

 나는 마침내, 최종 심급인 3차 병원(대학병원)까지 가게 되었다. 디스크 질환으로 우리 지역 손 꼽히는 명의라는 정보를 입수한 채로. 무려 4시간을 대기해서 만난 그는, 확률이 지극히 낮다며 재활의학과로 전과시켰다. 그리고 재활의학과에서 수행한 모든 검사 결과는 티 없이 정상이었다. 재활의학과 의사는 말했다. 혹시 최근에 스트레스가 많았느냐, 심리적 문제일 수 있다……. 결과를 믿을 수 없었지만,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그날 병원을 나오며, 오랜만에 사위를 둘러보았다. 꽃망울이 달려 있던 자리엔 어느 새 푸른 잎들이 놀리듯이 돋아 있었고, 마른 벚꽃잎 몇 개가 하수구 근처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의 봄이 남긴 흔적을 보며 깨달았다. 내가 마미총 증후군이 아니라면, 미친 게 틀림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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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발적으로 정신과를 찾아가는 일이 그렇게 힘든 줄이야. 그것은 “정신병 있냐?”라는 '드립'에 은닉된 내 안의 편견과 싸우는 일이었으며, 그런 편견이 만든 불안과 싸우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이런 여러 과정을 밟는 동안 내가 정신과를 가야 할까, 하는 회의감과 싸우는 일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정신과에서 대략 3시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검사와 상담을 했다. 하얗게 타버린 채 정신과를 나오면서 가슴 복판에 누군가 커다란 터널을 뚫어 놓은 기분이었다. 나의 모난 부분이 아픈 부분이라는 걸 깨닫게 되자 밀려드는 안도감(이제 편안해질 수 있겠구나)과 존재론적 허무함(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말이다.


 처음엔 희망이 생겼다.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아주 낯선 공허함이 찾아왔다. 독특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라 여긴 것은 정신과 의사의 입을 통해 불안 삽화와 우울 삽화로 재정의되었고, 과거는 이어진 상담을 통해 전면적으로 해체되어 새롭게 라벨링되었다. 상술한 허리디스크 경험은 극도의 불안이 야기한 ‘신체화 장애’에 해당했다. 나는 이런 낯선 통에 담긴 과거가, 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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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런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운 좋게도 나는 약발이 아주 잘 듣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교과서적인 케이스라고 했다. 약효 발현 시기나 효능 등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상당히 바람직하다고.     

 향정신성 의약품이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약에 대해 예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불행과 재난의 시나리오를 구성하던 머릿속이 깔끔히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관목을 가지치기하듯 잡념이 사라지며, 정신적 자원 잉여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감정 소비가 싫어서 혹은 두려워서 꺼린 일들을 하나 둘씩 해나가기 시작했다. 세계는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확장됐다. 심지어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일 년만에 복용을 중단하기도 했다. 거의 완치 상태였으니까. 그해는 기록 이래 가장 무더운 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영 끝나지 않아야 했다. 하염없이 돌아가던 19년 여름의 선풍기 날개처럼.


     




 하지만, 세상사 뜻대로 되는 일이 무엇 있던가. 심지어 불로초 빼고 다 가졌을 트럼프 아들도 실연의 아픔은 겪을 터인데. 그렇다, 나는 입대하게 된 것이다. 질병코드 F, 즉 정신질환에 해당하는 질병은 치안 직종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철저하게 보호된다. 어차피 거의 완치됐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병을 숨긴 채로 입대했다. 다행히 나의 병은 재발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의 샤이한 내면을 모른 채로 군 생활을 지속했다. 


그곳에선 인생 곡선의 기울기가 이렇게 가팔라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잔인한 일상이 이어졌다. 스키점프마냥 슬로프를 타지도 않고 멀찍이 낙하하는 기분이었다. 눈딱감고 낙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아.....? 안타깝게도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600여일 간 그 점프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들도, 무고한 사람들도 모두 마음을 다쳤다.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를 막론하고, 군대의 질서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다 큰 성인 남성의 서러운 흐느낌은 하루건너 하루 화장실 끝 칸에서 들려오곤 했다. 그런 흐느낌이 굳어 어른이 된다는 촌스러운 명제는 너무나 끔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두(가해자는 나쁜 놈이라며, 피해자는 나약하다며)를 경멸했고, 무엇보다 다른 척하는, 위선적인 스스로를 가장 혐오했다. 게다가 입대 전 경솔한 언행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말들이 하나 둘씩 여러 경로를 통해 건너왔고 그간 내 삶을 복기하며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소위 '현타'의 나날을 보냈다.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자기혐오가 깊어졌다. 쟤네랑 다를 게 뭐지?


 나는 결국 약을 다시 복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번에도 효과는 봤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의문이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약을 복용하는 나와 복용하지 않는 나는 너무나도 달랐다. 만약 약물로 만들어진 삶이 행복했다면, 약을 끊은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게 내 모습이긴 한가. 내가 행복을 입에 담았던 유일한 시기가 약을 처음 복용했을 때였다. 나의 마음은 오로지 화학적 - 전기적 작용일 뿐인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의 인격은 약으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의사와 심리 상담사는 약이 당신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다, 그건 당신의 성격이 불안에 억눌려 있다가 그제야 드러난 것이다, 대답했다. 그렇다 해도 약이 나의 행복한 삶의 필요조건이었음은 변하지 않았다. 약을 복용하지 않기 위해 치료를 하는 것이라며, 평생 복용할 각오로 치료에 임하지 말 것을 의사가 지적했지만, 불안장애가 재발한 나로서는 회의적이었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이 신경증에 대해 간과하는 부작용을 얘기해보려 한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이 정도 아프다고 병원을 가는 게 맞을까?’ ‘건강염려증 때문에 또 오버하는 걸까?’ 같은 식으로 스스로에 대한 검열이 무섭고 지난할 정도로 반복된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고민마저 불안장애 증상으로 느껴진다. 담뱃불이 꺼졌을까? 떠올리며 되돌아 가 확인하는 일이 불안장애인가, 아니면 상식적인 처사인가. 그러니 자연스레 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타인에 의해 자꾸만 흔들린다. 타인에게 나라는 인간을 정의해달라고 부탁한다. 말하자면 나와 타인 사이에 보호막 없이 그대로 타인의 말이 영혼을 침입하는, 면역 부재의 상태. 


 그리고 이 상태는 신경증 증상과는 다른 부분에서 자존감을 깎아내린다. 안에서부터 천천히.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나의 생각마저도 뜻대로 할 수 없을 때 느껴지는 무력감과, 의학에 통해 임의적으로 규정되는 과거에 대한 상실감. 다시 말해, 주체성 상실이다. 이게 바로 의사도 경고하지 않고, 제약사도 경고하지 않는 신경증의 가장 큰 부작용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부작용을 겪고 있다. 의사도 상담사도 이런 부작용에 대해서는 무능했다.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다. 믿음의 부재를 치료함으로써 믿음의 부재를 낳는다니. 이쯤 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정글 같은 이 세계 탓이 아닐까, 하고 원망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하지만 세계를 원망하는 것은 나 말고도 해줄 사람이 많으므로, 그리고 이를 생산적이고 공적 담론으로 전환할 능력이 내게 없으므로 나는 나 스스로를 구원해보려 한다. 물론 약에 의존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나는 비과학적 해결책을 굉장히... 극혐한다). 약은 꼭 필요하다. 다만 ‘약’이 ‘나’를 대신 하게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의사들이 들으면 기겁할 얘기지만 말이다.

 

 글을 쓰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뿌연 안개처럼 에어로졸 형태로 떠다니던 마음의 윤곽은 글을 쓰며 하나씩 그러모아진다. 상술한 부작용 역시도 글을 쓰며 구체화된 것이다(쓰고 나서 이해가 되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처럼 글쓰기는 공부의 시작일 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들이 실재하며, 틀리지 않았다는 말을 내가 나에게 전하는 전언처럼, 물리적으로 보이도록,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거울 속의 ‘나’도 ‘나’임을 믿을 수 있도록. 그리고 마침내 거울 속의 나에게 손을 내밀어 잡고 나올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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