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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영 Jul 11. 2021

버스에서’ 아이의입‘을 손으로 막았다.

이해받지 못하는 '틱'증상



아이가 초등학생 때 치료실 가는 날은 늘 전쟁과도 같았다.     


“왜?.... 왜?.... 왜?”

“킁.... 킁.... 킁...”

“악~~~~~~!!!”     


아이와 함께 탄 버스에서는 늘 ‘곤혹’스러웠다.. 아이의 뚜렛(틱 증상)은 날로 심해졌고, 그래서 치료받으러 갈 날이 많아졌지만, 차가 없던 나는 ‘버스’를 이용할 때마다 아이의 ‘입’을 막고 아이는 화를 내고...... 그러면, 더더욱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어떤 할아버지는 “조용하이소”라며 직접 항의했는데, 그때마다 “아이가 ‘발달장애’고 지금 ‘틱 증상’이 있습니다. 이게 기침같이 참는다고 되는 것이 아이고요......”

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아이의 병증을 설명하면서, 연신 “죄송합니다...”로 끝나는 양해를 구했다.' 아이 아픈'게 죄송한 일인가 싶었지만, 나의 가난이 미안했고, 아이의‘소음’이 억울했다.     


사회적 약자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몸으로 겪었다.(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당시 나는 “똥차” 한 대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버스에서 아이를 쳐다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편하게 치료실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고단한 내 삶에 ‘차 한 대’는 엄감 생신 꿈도 못 꿀 사치였음으로 ‘지옥 같은 버스행’은 계속되었다.     


치료실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아이에게  달콤한 ‘슈크림빵’을 사줘야 했다. ‘슈크림빵’으로 아이를 설득해서 다녀오는 치료실이라 이것은 ‘절대불변’의 요소였다.

(당시에 “파리바게트”는 고급 빵이었다. 요즘은 고급스러운 전문 빵집이 많이 있지만, 당시에는 “빠바”만큼 비싸고 좋은 빵이 없었다.) 빵집에서 아이는 빵을 주워 담고 늘 나는 내려놓는 싸움이 반복된다.

급기야 종업원이 “빵을 만지면 안돼요”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알아들을 일 없었다. 발달장애로 아이의 이해력은 일상생활 언어를 따라가지 못했고, 일일이 설명하기도 힘들어 슈크림빵 2개’를 쥐고는 거칠게 아이 팔을 잡고 빵집을 빠져나왔다.     

아이는 슈크림만 먹는다. 붕어빵에도 슈크림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어린 엄마’(20대 후반)인 나는 그때 무슨 ‘열정이었는지 아이를 데리고 각종 “박물관”과 “전시회”를 참여했다. 남들처럼 주말에 아빠와 놀러를 가고, 캠핑을 즐기고, 해외를 다녀오는 것은 꿈도 못 꿀 상황이었음으로(아빠는 늘 혼자 낚시를 갔다.) 엄마인 나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 이였다.


버스 두세 번 갈아타며 다녀오는 길에서 ’ 다신 안 가야겠다 ‘라고 늘 다짐했지만, 이내 주말에 집안에서만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 나의 다짐은 무너졌다.     


“먼 곳이 별게 있냐? 해외라고 뭐 다를까?” ,"뭐라하든 사과하고 다니면 되지"라고 내심 나를 위로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근처 볼거리를 찾아다녔다. 볼거리가 딱히 없는 날은 ’ 동네 시장‘에서부터’ 대구에 서문시장‘까지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내가 사는 곳은 경북 경산으로 대구까지 거리가 1시간이 넘는다.) 그러지 못하는 주말이면 아침부터 ’ 김밥을 싸고  물을 얼려 ‘ 배낭가방 한가득 등에 메고는 동네 신축 아파트의 놀이터로 원정까지 떠났다. (신축 아파트의 놀이터는 늘 새로운 놀이기구로 가득했으니, 거기서 주말 낮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즐겼다.)          


하루는 친구들도 다 간다는 그 “워터파크”를 가자고 아들이 졸라댔다. 워파파크는 입장료도 비쌌지만 그곳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갈 자신이 없없다. 그렇다고 졸라대는 아이를 말릴 수도 없어, 나는 집에서 아이들에게 반 바지와  그럴싸한 나일론 티셔츠(물에 젖으면 레시 가드 같아 보인다.)를 입혀 동네 ’ 바닥분수‘가 있는 곳에 물놀이를 떠났다. 마구 뛰어다니면서 놀고 있는 아이들 곁에서 나는 돗자리를 펴고 아이스박스에 담아 간 커피를 마시며 아이들 수박을 잘라 먹였으니, “이곳이 워터파크지...” 하면서 아이들 모습에 즐거워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꿈에 그리던 “똥차”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그간의 설움을 딛고 “똥차”하나 장만할 때까지 아이는 훌쩍 커버렸고 다행히 아이의 틱증상도 매우 호전되어갔다. 아이와 함께 ’ 동해 바닷가‘ 라도 놀러 갈려고 매번 용썼지만, 아이는 어느새 동네 친구들과 ’ 피시방‘을 가거가 ’ 농구‘하러 가는 것이 더 좋다고 할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의 소원이던 ’ 워터파크‘를 가려고 ’ 레시 가드‘를 셋다 멋지게 장만했지만 아이는 친구들과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물 조심하고 후나, 사진 많이 찍어와서 엄마 보여줘...”


하며 아이가 친구들과 ’ 워터파크‘ 까지 가는 길을 내 “똥차”로 태워줬으니 그것으로 만족 해야 할지...     


시간은 ’ 어리고 아픈 아이‘를 기다려주지 않고 훌쩍 떠나 버렸다.

그때의 설움이 이내 추억이 되어, 아이를 ’ 워터파크‘에 내려다주고 기다리는 길에 나는’ 파리바게트‘를 가서 쟁반 가득 ’ 슈크림빵‘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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