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잃어버린 가족
사냥꾼의 변심
해가 숲 위로 편편히 떨어져 내린 어느 날, 아비는 형아와 나를 데리고 숲 속을 향했다. 더위는 꺾여 발목을 덮는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아비는 어떤 움직임의 파동을 느끼고 몰래 뒤를 밟고 몸을 낮추고 잠복을 하였다. 잠복은 상황을 재정비하는 것이다. 꼿꼿하던 귀는 접히고 입은 긴장하고 시선은 고정되었다. 사냥감이 한눈을 팔면 거리를 슬금슬금 좁혀 사냥감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든다. 여기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시선은 사냥감에 향해있고 근육을 긴장시켜 급습할 준비를 한다. 귀와 수염은 뒤로 접히고 근육은 뼈를 타고 등을 따라 출렁이고 엉덩이는 씰룩씰룩거리며 무섭게 집중한다. 다시 사냥감이 한 눈을 파는 사이 전광석화와 같이 몸을 날린다. 실패다. 실패를 했지만 실패자라는 느낌은 없다. 본성에 충실한 진심이고, 자신의 존재이유이고, 이성이나 논리보다는 직관을 믿는 태도이다. 성공적인 사냥을 위해 공격성을 조절하는 인내심. 공격하고 싶은 열망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열망을 조절하는 인내심이다. 아비는 열망과 인내의 불협화음을 즐긴다. 행복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불편함을 끌어안아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나들이처럼 보였다.
그랬던 아비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 숲 속을 돌아다니면 잃어버린 자식이 생각나든지, 아니면 반쯤 정신 나간 어미에 지친 건지. 그가 사냥을 버린다는 것은 인간처럼 순환적인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사냥꾼으로 삶은 매 순간이 모험이다. 반복적인 삶에서 오는 권태가 없다. 순간에 기대어 살기에 매 순간 충만한 삶을 산다. 현재의 삶에 충실한 삶이다.
그 후, 아비는 산책로 주변을 슬렁슬렁거리고, 화물차트럭주위를 감돌기도 하고, 쓰레기더미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무심코 길가의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운 좋게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를 산책로에서 만났다. 날씨에 관계없이 여러 옷을 겹쳐 입었던 할아버지는 사료를 챙겨주곤 했다. 아비는 시간 맞춰 산책로를 나갔고, 할아버지 발치에서 발정기가 아닌데도 뒹굴었다. 그나마 운이 좋은 거다. "십팔 놈의 고양이", "저놈의 고양이 새끼"라는 천박한 말을 듣거나 여차하면 몸이 던져지거나 머리에 무언가를 맞을 수도 있고 배를 차일수도 있고 차에 몸이 눌리거나 먹지 못할 것을 먹고 피를 토할 수도 있다. 배를 걷어 차여도 아픔을 느낄 새 없고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도 멀리 달아나지 않으면 더 험한 꼴을 당하고 만다. 이런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밤이 이슥한 시간에 들어왔고, 바람이 불던 날 집을 떠났다. 바람이 아비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약간의 역사
그렇다, 가족과 헤어지고 집사와 생활한 이후, 몇 가지 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다른 종과의 동거니 완벽한 조화는 되레 이상한 일이다. 뿔뿔이 흩어진 나의 가족만큼 비극적이지는 않지만 집사의 가족도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음을 눈치챘다. 집안마다 아픈 구석은 있기 마련이다. 거실의 가족사진에는 누나집사의 엄마와 할아버지도 있다. 조금씩 얻어들은 바, 누나의 엄마는 암병동에서, 할아버지는 요양원에서, 얼굴이 시트로 덮였다. 물론 사람들이 죽음에 관한 신파조의 이야기를 싫어하는 건 안다. 알면서 굳이 말하는 이유는 소멸한 집사가족에 대해 약간의 역사를 말해야 할거 같아서다.
먼저 누나집사의 엄마이다.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이 있다. 누나의 엄마는 살림밑천을 넘어서 집안형편에 꿈을 접었고, 지금으로선 수긍하기 어려운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것을 양보하고 끊임없는 금지와 마주했다. 10여 년의 결혼생활은 이혼으로 끝났고, 두 남매만을 흔적으로 남겼다. 그래도 롤러코스트 같은 인생에 행운이 있기를 기대했지만 삶이라는 괴물은 그녀를 나뭇가지처럼 부러뜨렸다. 그런 그녀에게 가슴이 조여 오는 느낌과 찌르르 저려오는 느낌으로 불길한 증세는 시작되었다. 불안을 잠재워 주기를 간절히 기대했던 의사는 정밀검사를 위해 그녀를 병원 여기저기로 보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온몸으로, 암은 사람들의 소곤대는 소문처럼 온몸으로 퍼져 갔다. 나무줄기의 수줍은 꽃봉오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것과 같았다. 수술하고, 항암 치료하고, 방사선 치료도 했다. 약봉지는 서랍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다. 몸은 약들의 저장창고였다. 참을성 많던 그녀도 항암 치료과정은 많이 힘들어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일상적인 대화를 하던 그녀는 몇 분 만에 호흡곤란을 겪기도 하고, 산소포화도도 떨어지고, 속이 메스꺼워 구역질을 했다. 그 이후에는 아프다면 진통제를 주고, 목이 마르다고 하면 수액을 놓아주고, 숨이 가빠지면 산소호흡기를 달아주었다.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제스처이다. 임종이 다가오면서 임종실이라는 1인실로 옮겨졌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똑같은 몸이었지만 그녀의 육신은 온기를 잃어버린 체, 유리창을 지나쳐 온 평행사변형의 햇빛 속에 가로놓여 있었다. 기적같이 바라던 일상 대신 죽음이 가족 앞에 왔다.
그 무렵,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삶도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또다시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안정적이다가도 새로운 증세가 반복적으로 오래 지속되었다. 서로가 지쳐갔다. 노년은 무자비한 전투이다. 이 전투가 무자비한 이유는 하필 투지를 불태우기 어려울 때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스스로 삶을 정리하기를 기대했다. 두 번에 걸친 시도는 불행히도 성공하지 못했다. 어쩌면 삶을 연장하는 것은 죽음의 고통을 연장하고, 삶의 노고로부터 도망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죽음은 그나마 남아있는 자신의 품위와 영화를 지켜주고, 그의 지나온 세월을 용서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수면제를 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넘쳤다. 그에게는 수면제는 죽음으로 이끄는 희망열차다. 깨어있는 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그 정도 나이가 들면 몇 가지 기술만을 부린다. 자고, 먹고, 자고, 먹고, 또 자고를 지겨울 정도로 반복한다. 상승과 추락을 반복했던 꿈의 몽롱함이 멈추면 신경질을 부린다. 삶이 지겹다고. 또다시 살아난 게 지겹다고. 거동이 불편한 그의 온몸은 멍투성이었다. 당연히 가족은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요양원에 보냈다. 집에서, 자신의 침대에서, 죽게 해 달라라는 간절한 소망을 외면했다. 그를 위한다는 말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존엄을 빼앗아버렸다. 그는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었지만, 요양원에 보내지고 이 주 후 하나의 쓸쓸한 주검이 되었다. 얼굴은 미라처럼 오그라들었고 쭈굴쭈굴한 메마른 주름살 투성이었다. 그런 골동품 같은 늙은 남자는 흰 시트에 덮인 체 바퀴 달린 침대에 실려 나갔다. 그리곤 자신의 마지막을 환대하는 불길의 날갯짓으로 던져졌고, 최후의 불길은 그를 할퀴고 집어삼켰다. 뭐, 그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