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폴'"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니나가 잡혀있는 마왕의 소굴로,
어른들은 모르는 4차원 세계,
날쌔고 용감한 폴이 여기 있다.
요술차 마술봉 딱부리,
삐삐 찌찌 힘을 모으자.
대마왕 손아귀에 니나를 구해내자."
만화의 내용인즉슨, 주제가에 나와있는 그대로다. 공상을 좋아하는 폴이 소꿉친구인 니나를 구하기 위해 현실과 4차원을 넘나드는 이야기이다. 이상한 나라인 4차원 세계에선 비상사태가 일어나고, 폴과 그의 친구들이 이를 정상상태로 만드는 구조다. 소설가 '박성원'은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의 연작에서 '이상한 나라'는 4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임을 말하고 있다. 현재 이곳은 그냥 평상시가 비상사태인 이상한 나라다. 삼촌 집사도 관습적이고 절충적인 글보다는 가치를 전도하는 글을 쓰려고 한다. 어리석은 글을 세상에 또 하나 보태기보다는 다른 세계, 다른 삶을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원한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이 친자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여러 가지 일들이 그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고, 무엇보다 평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왕자와 거지'를 읽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더 했다. 언젠가 자신의 신분이 제대로 드러날 거라 믿었다. 그게 아니라면 '트루먼 쇼'처럼 거대한 스튜디오에서 벌어지는 지상최대 라이브 쇼의 주인공이다.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결말이 어찌 되든, 그가 주인공이다. 만약에 그것도 아니라면 시뮬레이션의 프로그램이다.
소름감 돋는 현실이 시뮬레이션이라면 빅뱅은 어쩔 거며, 생명의 기원, 진화론, 상대성 이론, 웜홀, 양자역학, 쿼크, 암흑물질, 끈이론은 어떻게 되는 거고, 교조적 종교와 추상적 철학은 어떻게 되는 건가.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는 걸 처음으로 말한 인간이 있다. '동굴의 우상'이라나 뭐라나. 손발이 묶인 채 동굴의 안쪽면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등 뒤에는 일렁이는 불빛이 있었다. 그 불빛에 동굴벽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그들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결박을 풀고 뒤를 보게 했다. 그림자를 만들게 한 물건과 일렁이는 불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낯선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모든 것이 시뮬레이션이라면,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시뮬레이션(롤 플레잉 게임)의 개발자일 수도 있고, 아니면 6500만 년 전 '파충류 대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공룡들일 수 있다. 인간들에게는 소행성의 충돌로 공룡이 멸망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소행성은 멀찍이 비껴갔다. 대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공룡들의 후손들은 시뮬레이션을 만들었고, 그것을 위장하기 위해 소행성 충돌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지어내고는 권태로울 때마다 포유류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구경하고 있을지 모른다. 더 나아가 어쩌면 우리를 시뮬레이션했던 공룡들도 더 큰 시뮬레이션 속에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인간의 계몽을 위해 2천 년 이상 인간을 지켜본 외계인이 있다. 한 때는 인간 앞에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서 도움을 주려던 존재가 있었다. 바로 예수다.
그들이 누구이든, 인간들의 세상을 지켜보다 시뮬레이션의 오작동으로 70억 명의 인간들이 가상현실임을 깨달아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인간이 기후위기로 언젠가는 생각보다 빨리 멸종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을 벌기 위한 행동을 멈출 수 없는 거만 봐도 짐작이 간다. 과장해 말하면 아우슈비츠행 열차를 수용소로 보내기 위해 열심히 일한 사람들과 별반 다를 거 없다. 여전히, 인간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직장을 나가고 집세를 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살 것이다. 그들은 운이 좋아 집값이 올라 부자가 된 것을 마치 자신의 근면과 성실 덕분이라 생각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신들은 살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의 말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소설은 사고(思考) 라느니, 소설은 묘사(描寫)라느니 해도, 결국은, 모든 소설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다. 이야기가 곧 우리이다. 그 이야기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불안감을 다루고 있다. 그 인간과 세상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있다. 결국은 모두 죽는다.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도 종말을 맞을 날이 온다.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열평형 상태 말이다. 우주의 '열사망'이라고도 부르는, 원자를 포함한 모든 우주의 물질이 꽁꽁 얼어붙어 정지하고 에너지 흐름도 사라지는 최후의 순간이 온다. 물론, 이것도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 완벽하게 보이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도 버그나 오류가 존재한다. 그때, 시뮬레이션의 개발자가 할 일은 두 가지다. 시뮬레이션을 리셋하든, 우주 2.0으로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하나님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쩌고 저쩌고..
건 번호 49683-582 ('let it be')
사건 49683-582 ('let it be')
사건번호 49683-582 ('let it be')
삶 측 청원
저희들 삶은, 당신이 온 누리에 최초의 빛살을 던진 이후부터 전능하신 당신을 경배하고, 십일조의 헌금을 엄수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무한한 의지 덕분에 빛과 모든 형상은 저마다의 향연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욕망은 산더미처럼 쌓여만 갔습니다. '있음'은 '없음'으로 둘러싸여 이제는 당신의 세계에서 제가 할 일은 점점 위축되고 저희의 행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공간에서는 저희가 서 있을 자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세간에서는 당신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외람스럽게도 제멋대로 개사하여 다음과 같이 부르기까지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직도 하늘에 계실지 모르는 누군가의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물며, 당신의 존재를 보이고 싶으시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스스로의 자족감을 버리시지 못하면 당신의 하늘도 황폐함을 치유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오늘도 변함없이 유예하지 않는 고통을 한가득 내려주시니>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고통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할 힘은 소멸되고, 증오만이 돋아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 그만 저희에게 신경을 끄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가 혹시나 하는 당신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고>
악에서 구하소서.
<제멋대로 살도록>
아멘.
<내버려 주십시오>
이에 저희는 길가메시가 친구인 엔키두의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이 없는 생명의 땅을 찾아 나선 것처럼 귀 청원자들도 저희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죽음의 횡포를 당법정이 거두어 주시길 바랍니다. 더 이상 남아있는 모든 힘이 소진되기 전에, 왜소한 저희를 굽어 살피시어 저희를 괴롭혀온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삶의 확장을 열어주십사 절박한 청원을 귀 법정에 드립니다. 귀 법정의 현명한 판단으로 죽음을 저희들로부터 추방하신다면 당신께 바치는 저의 사랑은 결실을 맺고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세상은 넘쳐흐를 것입니다.
삶 측 변론
장엄하신 신께, 우리의 가엾은 청원자가 당신에게 소망하는 것은 죽음의 베일을 벗기고, 온 우주를 아침 햇살 같은 생명의 힘으로 가득 차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당신은 무량 억겁의 정적을 깨고 하늘을 여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여신 것처럼 귀 청원자들의 어깨를 사정없이 짓누르는 짐을 본 법정이 거두어주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당신께 심판을 요구하겠습니까? 삶은 죽음을 넘어서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땅의 인간들은 죽음 뒤에 천국이 있다느니, 극락 세상이 있다느니, 다시 부활한다느니,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산다느니, 하면서 아이디어를 내어 왔습니다. 그렇게 좋은 천국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좋은 곳이 있으면 그곳에 가기 전날 몸이 근질근질하고 설레게 마련인데 막상 죽음의 순간이 오면 조금이라도 늦추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을 축복하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목격합니다. 그것은 무자비한 죽음이 삶의 마지막 품격마저 저버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건의 중요함을 알면서도 본건의 피고인 죽음은 차일피일 심문을 연기하면서 본 법정을 능멸하고 당신을 모욕했습니다. 청원자인 삶도 위대한 당신처럼 죽음에 의해 수많은 능멸과 무시를 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청원인은 당신을 향한 멈출 수 없는 신앙심과 세상을 황홀함으로 가득 차게 하겠다는 신념으로 당신께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 간악한 죽음은 날로 흉포해져 온 힘을 다해 평온함을 깨뜨리고,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체 당신이 부여한 능력을 넘어서는 유린행위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생명은 삶에 탄식을 하고, 죽음의 공포에 안절부절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삶은 급기야는 여인네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파묻듯 생명의 소중함을 모른 체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전능하신 당신에게 절박하게 부탁드립니다. 당신의 장엄한 힘으로 죽음의 경거망동과 횡포를 벌하시어 더 이상의 흉포한 유린을 소멸시켜 주시고, 순진한 삶으로부터 사악한 죽음을 영원히 추방하여 주십시오. 그들의 파문과 추방은 우주를 생명으로 넘치게 하는 것이니 당 법정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청원자들은 그런 결말이 나기를 기도합니다.
죽음 측 변론
당법정의 재판관이신 신께 아낌없는 열렬한 찬사를 보냅니다. 저는 영광스럽게도 본건의 죽음 측 법정대리인을 맡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금기의 대상인 죽음 측 법정대리인을 맡는 것에 부담감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죽음 측 이야기를 듣다 보니 선이해(先理解)가 배제된 순수한 이해를 한다면 어땔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당당히 그들의 혐의 없음을 밝히고 죽음이 본연의 맡은 바 책무를 다 할 수 있도록 소취하(訴取下)의 마땅함을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본 변론에 들어가기 전 먼저 한 말씀을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삶 측 변론 중 저희가 심리를 차일피일 미룬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이 없음을 밝혀둡니다. 일정에 대한 고지를 받은 건 사실이나 사정상 그 기일이 불가함을 사전 고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의성실의 원칙상 사전에 상대방에게 그와 같은 사정을 고지했음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우리의 법은 신의 의지를 최상위 규범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는 당신께서 세상을 열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입니다. 당신은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세상을 열면서 삶뿐만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피조물도 창조하셨습니다. 그건 삶의 생기뿐만이 아니라 죽음의 필연성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전능하신 당신의 피조물인 것입니다. 어찌나 감동스럽던지 차마 말로 표현하기가 난망합니다. 그런 당신을 생각하면 당신의 완벽함에 찬미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대담한 설계로 모든 경이로움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당신은 생명을 사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피조물인 죽음도 사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죽음을 헛되게 잘못 이끌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리석게도, 삶은 죽음을 마치 사악함의 본령처럼 말합니다. 얼마나 어수룩한 삶입니까? 삶은, 별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지, 반딧불의 아름다움은 또 어디에서 오는지, 꽃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그 아름다움은 대립되는 것에서 나옵니다. 어둠이 없다면 별과 반딧불과 빛이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소멸이 있기에 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한번 생명이 영원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새 생명에 대한 찬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기존의 생명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겁니다. 기존의 생명은 지겹고, 무관심은 더 심해지겠죠. 그런데도 삶은 죽음을 비난하면서 죽음을 무심한 자라고 하며 죽음을 꽁꽁 묶어두려고 합니다. 그들의 처신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새로운 탄생에 기뻐하며, 그 후에는 우연에 맡기고, 그리고는 필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죽음을 없애거나 죽음의 능력을 반감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삶은 유한한 것이고 그렇기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진부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죽음을 위한 변론을 허용하셨으므로 귀 법정에 두 가지 사실을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첫째로, 삶이 앞서 말한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겠습니다. 인간들은 대부분이 정신과 육체라는 이원론을 믿고 있습니다. 이원론을 근거로 죽음 뒤에도 정신은 영원할 거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유니버스우스 법전 제6권 <다리가 둘이거나 넷이거나> 편의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설령 그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자기모순적인 이야기입니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는데 죽은 다음에 산다는 것에 논의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입니다. 사후의 삶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입니까? 그들이 그런 것을 믿는 이유는 인간만이 특별하다는 배타적 선민의식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그저 물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비물질적인 존재인 정신이라는 것을 창조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이란 것이 원자로 구성된 물체의 전기회로가 끊긴 상태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내동댕이 쳐서 작동되지 않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했는데도 애써 모른 체합니다. 둘째로는, 우주에는 지구를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구에서는 살아있다는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죽은 상태가 자연스러운 형태인데도 삶은 뻔뻔하게도 우연한 삶에 감사하기는커녕 한 발짝 더 나아가 영원한 삶을 달라고 하고, 죽음이라는 건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건 나그네가 주인행세를 하려는 격입니다.
영혼의 안내서인 전도서에서 당신은 하늘 아래 무엇이나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고,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으면 돌을 거둘 때가 있고, 안을 때가 있으면 멀리 할 때가 있고, 찾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가 있고, 지킬 때가 있으면 버릴 때가 있고, 찢을 때가 있으면 꿰맬 때가 있고,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싸움이 일어날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신이시여, 당 법정에서 당신의 절대적인 권능을 보여주시어 당신을 향한 저희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신의 판결
원고 측과 피고 측의 성실한 주장은 나름 설득력 있게 들었다. 삶 측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죽음 측의 논리는 일견 타당하다. 삶과 죽음은 파괴하기 위해서 창조한 것은 아니다. 좋은 열매를 생산치 않는다는 이유로 나무를 죽여서는 안 된다. 삶을 완성하는 이는 죽음이다. 죽음을 왜 이렇게 두렵고, 아쉽게 생각하는지, 그건 질감이 없어 그런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데 슬프지 않을 수 없다. 현시점에서 스스로의 죽음 이후를 상상해 본다면 그럴 수 있다. 죽음은 꿈도 없는 깊은 잠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 아무런 느낌, 의식이 없는 상태다. 그런 죽음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항상 곁에 있다.
과연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슬픔도, 그 사람이 존재했었고 함께해서 누릴 수 있었던 기쁨도, 영원하지 않다. 우주에는 수많은 원자들이 먼지처럼 떠다니고 있다. 먼지처럼 떠다니는 원자들은 사랑했던 아비이고, 어미이고, 나무이고, 꽃이고, 풀이고, 책이고, 별이다. 모든 것들은 우주의 일부이다. 존재는 좁은 시야로 보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존재 자체는 생기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존재의 형태가 변하는 것이다. 특별한 행운이 겹쳐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네가 되었다. 그 존재가 아주 잠시 삶을 누린 것이다. 내려진 삶의 닻줄을 거두고 어둠의 장막 속으로 가는 것은 먼지 같은 원자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영원한 소멸이 아니라 영원의 생성이고 무상의 희열이다. 여기 한 편의 시가 있다.
신은 진흙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신은 진흙 덩어리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덕과 바다와 하늘과 별, 내가 빚은 모든 것을 보라."
한 때 진흙이었던 나는 이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봅니다.
운 좋은 나 그리고 운 좋은 진흙.
진흙인 나는 일어서서 신이 만든 멋진 풍경들을 바라봅니다.
위대한 신이시여!
오직 당신이기에 가능한 일.
결코 나는 할 수 없는 일.
당신 앞에서 나는 그저 초라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은,
아직 일어나 주변을 둘러볼 기회를 갖지 못한 다른 모든 진흙들을 떠올릴 때.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지만, 진흙들 대부분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영광에 감사드릴 뿐.
진흙은 이제 다시 누워 잠을 청합니다.
진흙에게 어떤 기억이 있을까요.
내가 만나봤던, 일어서 돌아다니던 다양한 진흙들은 얼마나 놀라운지.
나는 내가 만났던 그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출처> '커트 보니갓' (let it be 그냥 내버려 두렴)